침대에서 일어나 잠시 몸을 풀고 거실로 나왔다. 창밖은 여전히 촘촘한 비로 가득 차 있었다. 새벽부터 쉼 없이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어도 그칠 기색이 없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흐릿한 회색빛 하늘 아래, 세상의 소음이 물에 잠긴 듯 조용했다.
어젯밤, 빗소리가 너무 커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불을 끄고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지금 이 시간, 나처럼 잠들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각자의 방 안에서 제각기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
비 오는 밤이면 그런 상상이 어쩐지 조금의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늘 혼자지만 완전히 혼자는 아니라는 생각.
아침 명상을 마친 뒤 책상 앞에 앉았지만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창밖의 비는 점점 더 굵어졌고, 그 소리가 마음 깊은 곳까지 젖어 들었다.
할 수 없이 자리를 옮겨 주방으로 갔다. 오랜만에 커피를 내려 마시기로 했다. 한참 캠핑을 다니던 시절, 매주 자연 속에서 웃으며 지인들을 위해 원두를 볶고 갈던 기억이 떠올랐다.
프라이팬 위에서 튀던 원두의 소리, 손으로 조심스레 갈아내던 그 따뜻한 손길,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담긴 마음. 오래된 드립세트를 꺼내어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았다.
그 작은 의식이, 오늘은 어쩐지 마음을 정성스럽게 다루는 일처럼 느껴졌다. 커피가 완성되었을 즈음,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빗줄기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가로수와 축축이 젖은 아스팔트.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인데도 오늘은 왠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커피 한 모금이 입 안을 맴도는 동안, 아주 오래전 누군가와 나눴던 대화가 불쑥 떠올랐다. 그 사람이 남기고 간 말들이 잠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비 오는 날의 커피는 그런 것들을 조용히 끌어올리는 힘이 있다.
쓴 원두 커피 한 잔과 간단한 빵 한 조각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특별하지 않은 조합이었지만, 그 고요한 순간에 어울리는 딱 그만큼의 풍요였다.
그리고 책을 꺼냈다. 오늘은 좋아하는 유시민 작가의 <청춘의 독서>를 읽었다. 책의 제목도, 작가의 성향도 어쩌면 오늘 같은 날을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오후 들어, 하루 종일 내릴 것 같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여전히 공기 중엔 습기가 가득했지만, 그 사이로 햇살이 슬며시 밀려들었다.
약간 늦은 점심을 먹고 아내와 함께 대구 중심가로 나섰다. 본격적인 여름을 앞두고 의류와 패션용품을 준비하려는 외출이었다.
오전의 비 때문인지 백화점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긴 우산 자국이 바닥에 얼룩처럼 남았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모두 조금씩 더 분주해 보였다.
비가 씻어낸 하루의 절반, 그리고 남은 절반은 사람들의 온기로 조금은 복잡하게 채워졌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나선 대구 중심가였다. 북적이는 백화점 안,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매장을 둘러보는 일이 낯설지 않으면서도 새삼스러웠다.
아내가 옷을 고르고 이것저것 입어보는 모습을 지켜보며 예전 같았으면 조바심과 짜증이 먼저 올라왔을 텐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저 좋았다.
작년 아픈 일을 겪고 나서 아내는 체중이 꽤 많이 줄었고, 이제는 어떤 옷을 입어도 핏이 제법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히 손도 대지 못하던 스타일의 옷을 망설임 없이 집어 들고, 거울 앞에서 흐뭇하게 웃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냥 쇼핑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의 회복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오늘의 하루가 어쩐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모처럼 아내와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간단한 간식과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는 오랜만에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샀다며 연신 들뜬 표정이었다.
비싼 명품을 산 것도 아니고, 세일에 세일을 더한 옷 몇 벌을 고른 것뿐이었다. 양손 가득 무거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아내는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엄마로, 또 누군가의 며느리로 그렇게 30년을 살아온 사람이 자신만을 위한 쇼핑을 오롯이 즐긴 게 대체 언제였을까.
잠시 생각해보니,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난 지금 내 곁에 있는 이 여자의 남편으로, 나는 과연 얼마나 따뜻했을까? 배려했을까?
늘 자신은 괜찮다고 말해주는 얼굴 앞에서도,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당연히 여기며 살았던 건 아닐까.
오늘의 쇼핑은 그래서 더 깊은 반성이 되었다. 아내의 웃음은 소박했고, 그 미소는 오래도록 무겁게 남았다.
집에 도착할 즈음 외식을 제안했다. 아내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근에 새로 생긴 언양불고기 집으로 향했고, 막내도 학원을 마치고 바로 합류했다.
식탁 위로 구워지는 고기 냄새보다 더 진한 것은 웃음이었다. 평범한 하루가 조금은 특별해지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는 막내와 내 앞에서 오늘 산 옷들을 하나씩 꺼내 입으며 간단한 패션쇼를 열었다.
리액션 좋은 막내는 엄지손을 치켜세우며 “핏이 정말 좋다”고 말해주었다. 아니, 말해준 것이 아니라 정말 핏이 훨씬 좋아졌다.
어느새 우리 집 거실은 조명이 없는데도 따뜻했다.
서재로 들어와 이렇게 하루를 정리하는 지금, 아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늘 산 옷들을 손빨래하고 있다.
그 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비가 오던 아침부터 지금까지, 오늘 하루는 즐겁고 흐뭇한, 그러면서도 반성하게 되는 그런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