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5.아무 일 없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는 날.

by 마부자


침대에서 일어나 잠시 몸을 풀었다. 거실로 나가 창문을 열자 어제 내렸던 비의 흔적들이 유리창에 말라붙어 있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흩뿌려진 물웅덩이는 반쯤 말라 있었고, 그 사이로 햇살이 무심하게 내려앉았다. 이른 여름 특유의 열기가 아침부터 집 안까지 스며들었다.


제목: 풀잎을 닮기 위하여

풀잎 위에
내 몸을 기대어본다

휘청,
휘어지는 풀잎

풀잎 위에
내 슬픔을 얹어본다

휘청,
더욱 깊게 휘어지는 풀잎

오늘은 내 몸무게보다
슬픔의 무게가 더 무거운가 보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습기를 머금은 공기와 따가운 빛이 한데 섞여, 오늘 하루가 꽤 더울 거라는 예고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다 명상을 했다.


평소보다 마음이 일찍 가라앉았고 책상 앞에 앉아 천천히 하루를 열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집 앞을 잠시 걷다가 바로 후회했다. 한낮의 햇살은 사람의 기분을 순식간에 바꿔놓을 정도로 뜨거웠고, 바람조차 데워진 듯 따가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언가를 위해 걷고 싶었다. 이유는 없었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릴 때쯤 겨우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처럼 천천히 걷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는 바쁘게 그 더위 속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무심한 여름 풍경이지만, 그 안에 서로 다른 속도가 섞여 있었다.


비가 그친 다음 날의 햇살은 유독 날카롭다. 어제의 축축함과 오늘의 뻣뻣한 열기 사이에서 나는 묘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은 가벼웠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움직임 속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걸었고 내가 원하는 만큼 그늘을 찾았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천천히 하루를 써 내려간 느낌이었다.


하루가 저물 즈음, 뜨겁게 달궈졌던 집안의 온도도 슬그머니 식어갔다. 그러나 오랜만에 다가온 더위는 준비하지 못한 내 몸의 온도를 낮추지 못했다.


결국, 참다 못해 에어컨을 켰다. 작년 여름 마지막 날 이후 처음이었다. 아직 6월 중순인데 벌써 에어컨이라니, 괜히 투정처럼 혼잣말을 뱉었지만 이내 그 인위적인 바람이 내 등을 타고 지나갈 때 잠깐의 고마움이 스쳤다.


자연이 주지 않는 시원함을 억지로 만들어 낸다는 건 뭔가 미안한 감정도 들게 하지만, 때로는 사람에게 필요한 위로가 반드시 자연스러울 필요는 없다는 걸, 오늘은 그 바람이 가르쳐주는듯 했다.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차게 식힌 과일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방울토마토와 아식오이의 식감과 달콤함이 오늘 하루의 열기를 조금은 덜어주었다. 평소 같으면 나섰을 오후 산책은 오늘만큼은 생략했다.


밖을 나서기엔 몸도 마음도 그늘을 더 원했다. 대신 부엌에 앉아 느긋한 저녁을 준비했고, 온기가 조금 식은 밥상을 마주하며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걸음 대신 머무는 선택을 한 오늘이 어쩌면 더 단단한 하루였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 그저 쉬는 것도 삶의 일부라는 것을 조금은 인정해보기로 했다.


오늘도 그렇게 아무 일 없는 날이 저문다. 그러나 아무 일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큰 위안이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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