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아주 작은 스트레칭으로 몸을 깨우고, 자연스레 거실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월요일 아침이 되자 더 굵고 단단해졌다.
베란다 우수관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의 소리는, 마치 누군가가 내 마음을 조용히 두드리는 것 같았다.
회색 하늘과 차가운 공기, 잿빛 풍경 속에서 오히려 나는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그 불완전한 날씨가, 지금의 내 상태와 겹쳐졌기 때문일까.
제목: 뒷모습
귀가 예쁘거든 귀만 보여 주시오
눈썹이 곱거든 눈썹만 보여 주시오
입술이 탐스럽거든 입술만 보여주시오
하다 못해 담배가치 끼운
손가락이 멋지다면
그거라도 보여 주시오
보여 줄 것이 정하나 없거든
보여 줄 것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시오
기다린 뒤에도 보여 줄 것이 없거든
뒷모습을 보여 주시오
조심조심 사라져가는 그대 뒷모습을
보여 주시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명상에 들어가며 마음속을 하나씩 비워냈다. 빗소리는 그 어떤 음악보다 내 호흡을 고르게 만들었다. 아침 명상을 마치고, 서재의 창가에 앉아 책을 펼쳤다. 요즘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예전보다 덜하다.
성과에 목맸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나아가야 할 방향은 같지만, 속도는 달라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유시민 작가의 <청춘의 독서>를 읽었다. 작가가 청춘 시절 어떤 책에 기대어, 어떤 사유의 골짜기를 건너왔는지, 그 활자의 깊이를 따라가며 나도 자연스레 오래된 내 마음의 감정들과 마주했다.
정치는 둘째치고,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늘 인간에 대한 깊이를 배운다. 오늘도 그렇게, 또 한 가지의 이유를 더했다. 내가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잠시 후, 빗줄기가 잦아들더니 무색할 만큼 강한 햇살이 창밖을 덮었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책을 덮고 자전거 페달에 발을 올렸다. 영상 속 문장을 따라 읽으며 ‘약점’이라는 단어에 천천히 생각을 눌러 담았다.
약점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나를 가장 진실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빠르면 이번 주, 늦어도 다음 주에는 방사선 치료가 시작된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씩 치료와 관련된 정보들을 찾아보고 있다.
두경부암 환자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증상 중 하나는 ‘구내염’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입안 곳곳에 생기는 염증인데, 물조차도 쓰릴 정도로 아프다고.
입 안이 아프다는 건, 곧 삶의 기본이 무너지는 일이니까. 그래서 무알콜 가글이 도움이 된다고 해서 알아봤다. 환우들 사이에서 '탄튬가글'이라는 제품이 많이 쓰인다고 했다.
어떤 이는 미리 이 가글을 사용해 치료 내내 통증이 거의 없었다는 후기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이 준비할 때’라는 생각에 바로 약국으로 향했다.
첫 번째 약국에서는 없다고 했다. 대신 비싸고 고급이라는 다른 제품을 권유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도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약사의 조언보다, 같은 시간을 먼저 지나온 사람들의 경험을 더 믿고 싶었다.
결국 세 번째 약국에서 원하는 '탄튬가글'을 구입했다. 100ml에 2천 원. 저렴한 이 초록 물약이 나의 치료 기간을 덜 아프게 해주길,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약사는 두 가지 주의사항을 말했다. 물과 희석해서 쓰고, 7일 이상은 연속으로 쓰지 말 것. 작은 병을 들고 돌아오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 작은 불안을 정보로 바꾸고, 막연한 공포를 행동으로 바꾸는 일. 그 조심스러운 걸음이 오늘은 유난히 대견하게 느껴졌다.
비가 그친 하늘 아래, 무겁지만 단단한 공기처럼, 오늘의 나는 조금 더 의연했다.
가글을 마치고 나니 입안 가득 낯선 감각이 맴돌았다. 마치 치과에서 마취 주사를 맞고 돌아온 후, 입가에 남은 묘한 저릿함 같았다. 기분 나쁘진 않았다. 단지 생경했을 뿐.
오늘부터는 하루 2~3회 양치 후, 이 가글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익숙하지 않은 루틴이 하나 더 생겼다. 하지만 그것이 곧 나를 지키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엔 글을 정리하고, 저녁 준비를 마쳤다. 퇴근한 아내와는 이른 저녁을 함께 했다. 요즘은 그런 시간들이 유난히 고맙게 느껴진다.
식사 후 우리는 간단한 산책을 나섰다. 비가 막 그친 초저녁의 공기는 무겁지만 맑았고, 피부로 스며드는 바람은 싸늘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쾌하진 않았다.
너무 멀지 않은 거리. 말이 필요 없는 산책이었다. 나란히 걷고, 조용히 돌아왔다.
샤워를 마치고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오늘도 한 걸음. 아주 작은 걸음을 무사히, 담담히 지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