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1.별일 없다는 말로 긍정의
내 감정을 감춘다.

by 마부자


침대에서 일어나 잠시 몸을 풀고 거실로 나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무척 투명했다. 이 계절의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담백해서, 보는 이의 감정을 어디론가 차곡차곡 쌓아간다. 이른 여름 특유의 공기가 피부에 닿는 아침이었다.


명상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곤 책상에 앉아 조용히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에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한통의 전화가 내 마음속을 오래도록 흔들었다.


제목: 아끼지 마세요

좋은 것 아끼지 마세요
옷장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옷 예쁜 옷
잔칫날 간다고 결혼식장 간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철지나면 헌옷 되지요

마음 또한 아끼지 마세요
마음속에 들이 있는 사랑스런 마음 그리운 마음
정말로 좋은 사람 생기면 준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마음의 물기 마르면 노인이 되지요

좋은 옷이쓰면 생각날 때 입고
좋은 음식 있으면 먹고 싶은 때 먹고
좋은 음악 있으면 듣고 싶은 때 들으세요
더구나 좋은 사람 있으면
마음속에 숨겨두지 말고
마음껏 좋아하고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그리하여 때로는 얼굴 붉힐 일
눈물 글썽일 일 있다한들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지금도 그대 앞에 꽃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지 않나요
그 꽃을 마음껏 좋아하고
그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이전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밝은 목소리로 “잘 지내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반가운 마음이 먼저였지만, 말하지 않은 마음의 무게가 뒤따랐다.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아픈 데는 없었고, 뚜렷한 증상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없음’이 모든 것을 덮어주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공백이 더 조심스럽고, 더 무겁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내 삶에 일어난 이 조용한 변화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짧은 안부를 주고받고, 잠깐 웃으며 서로의 요즘을 나눴다. 농담도 오갔고, 오래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익숙한 말투였다.


그는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이제 그만 쉬고 다시 일할 준비 좀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언제까지 쉴 거야, 아직 한창인데 좀 더 일해야지”, “사람이 너무 쉬면 오히려 병 난다더라.”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와 20년을 동고동락했던 선배였고, 늘 그렇게 웃으며 서로의 시간을 견뎌왔던 사이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처럼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나 역시 평소처럼 그 농담을 웃으며 받아주었다. 같은 말투로, 같은 농담으로 맞장구치며.


통화의 마지막, 그는 ‘건강하자’고 말했다. 흔한 인사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오늘 내내 마음에 머물렀다. 어쩌면 건강하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겠지만, 나는 그 인사를 붙잡고 하루라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가끔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 채 누군가의 진심 곁을 지나친다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말해지지 않은 진심은 때로, 말보다 더 크고 조용하게 남는다.

어느날 나는 누군가에게 밝은 목소리로 안부를 전했지만, 정작 그 안에 고요히 앉아 있던 감정은 알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전화나 사람을 만날 때, 그저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병이었으면 좋겠다고.


“요즘 어떻게 지내?” 하고 물으면, “아, 감기로 좀 고생 중이에요”처럼 가볍게,

“요즘 암으로 고생 중이에요”라고 덤덤히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 않은 현실이지만.


아니, 사실 지금의 나는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상태다. 아프지도 않고, 겉보기엔 너무도 멀쩡하니까. 그런데 내가 망설이는 이유는 ‘암’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 때문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낮아지고, 말하는 상대의 표정은 굳어버린다. 걱정과 위로와 안타까움이 섞인 말들이 연이어 쏟아진다.


그 감정이 틀렸다고 말할 순 없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누군가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나 역시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꺼냈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이 병에 대해 편하게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말 대신 미소를 건넨다. 별일 없다는 말로 오히려 긍정의 내 감정을 감춘다.


사실은 별일이지만, 별일 없다고 말해야하는 병이 아닌, 별일 있지만 잘 이겨내라고 웃으며 건넬 수 있고 그 말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날이 오기를.


그래서 서로의 병마저 담담히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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