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0.아픈 이유보다 더 아픈
문장들이 있다.

by 마부자

열어둔 창문 틈새로 낯선 찬바람이 들이쳤다. 모처럼 새벽에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꿀잠을 자고 난 아침이었다. 창밖 하늘은 어제와는 전혀 달랐다.


회색빛 구름들이 뭉퉁 뭉퉁하게 하늘을 덮고 있었고, 그 아래로 빛은 한 줄기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내겠다는 표정 같았다. 나는 창을 반쯤 닫고 그 바람 속에서 천천히 명상을 마쳤다. 두 사람이 현관문을 나서고, 나도 외출 채비를 서둘렀다.


지난주 병원에서 받아온 진단서를 들고 보험회사에 서류 접수를 하러 가기로 했다. 우편으로 신청해도 되지만, 혹시 이런 저런 서류누락이 되서 문제가 되면 입원이후에 일정이 늦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아프지 않았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복이었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준비 없이 살아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보험이라는 걸 딱 그만큼만 들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아프지 않을 거란 근거 없는 확신이 내게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믿고 산 시간이, 이제는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아프지 않았으면 됐지.’ 하고 다짐했지만, 병이 생기고 나니 새삼 드는 생각이 있다.


보험이라도 좀 더 들어둘 걸.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스스로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길, 우중충한 하늘 아래 걷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병이 없었다면 이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래도 청구할 보험금이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이기적인 생각 같기도 했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마음조차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있는 현실에 솔직해지기로 했으니까.


보험사 창구에 도착해 대기표를 뽑고 앉아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상담 내용이 자꾸만 귀에 들어왔다.


큰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상담사는 매뉴얼대로 “해당 질병코드는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픈 건 다 똑같은데 왜 나는 안 되느냐는 항의.


그 말은 창구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다른 사람들과 번호표를 들고 대기하고 있는 나, 아니 아마도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어 놓았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나는 울컥했다. 아픈 사람에게 더 아 확실히 아파야 가능하다는 말까지 들어야만 하는 건가.


보험은 누구나 가입할 수 있지만, 혜택은 꼭 누군가의 ‘기준’에 맞아야만 한다는 것. 어쩌면 우리가 아픈 이유보다 더 아픈 일이 그런 문장들인지도 모르겠다.


내 차례가 되어 창구에 서니 상담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확인했다. 몇 군데 서명을 하고, 채 10분도 걸리지 않아 접수는 끝났다.


내 병명이 너무 명확해서였을까. 질문 하나 없던 상담사의 조용한 태도에 잠깐, 서운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묘한 기분은 에어컨 바람보다 더욱 서늘하게 내 피부를 자극했다.


자격지심이라는 말을 이런 순간에 쓸 수 있는 표현일까?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다.


상담사는 마지막에 조용히 말했다. “빠른 쾌유를 바랍니다.” 그 짧은 한마디가 건네는 상담사에게는 너무 미안했지만, 어쩐지 그동안 내가 들었던 위로와 응원의 말이 아닌 것 처럼 들려왔다.


두 번째 보험사도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물음 없이, 별다른 온기 없이. 병명이 담긴 서류 몇 장과 내 신분증, 그리고 짧은 서명이 오가는 사이, 그저 또 하나의 절차가 끝났을 뿐이었다.


그렇게 두 군데의 방문을 마치고 돌아서는 길. 평생 한 번도 올 일이 없기를 바랐던 곳을 이렇게 두 번이나 찾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나는 오늘 내 삶에 ‘병’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문서로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일상일 수도 있을 이 공간이, 나에겐 두 번 다시 존재하고 싶지 않은 가상의 한 장면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일을 마치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던 발걸음은 마치 하늘에 잔뜩 물을 머금은 회색 구름 같았다. 묵직하고 무채색이었다.


집 앞에 도착했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지 않았다. 나는 잠시, 평소처럼 산책을 마무리하던 벤치에 앉았다. 축축한 공기가 가슴 깊숙이 들어왔다.


오늘 오전의 무게를 떠올리며 숨을 고른다. 무겁긴 했지만, 그 무게의 추를 이 벤치 아래 조용히 내려두기로 했다.


오늘의 날씨처럼 흐린 날도 있을 것이고, 어제처럼 화창한 날도 다시 오겠지. 어쩌면 지금 이 흐림도 지나가는 한때일 뿐이다.


오늘 이 비는 언젠가 그칠 것이고, 나는 그칠 날을 맞을 준비를 천천히 해나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 한쪽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의 끝에는 이런 마음도 남아 있었다. 이렇게라도 미리 준비해두었기에, 지금의 나를 간신히 지탱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부여잡아주는 건 결국, 아주 작은 준비와 아주 작은 희망이었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흐릿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흐린 날이 있어야 해가 다시 뜰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조금씩 믿어보기로 했다.


마음속의 짐을 벤치 아래 내려놓고 일어섰을 때, 발걸음은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 냄비처럼 들끓다 식어가는 요즘의 감정들.


그 온도를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 순간만을 느끼기로 했다.


커피전문점에 들러 쓰디쓴 아아 한 잔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색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베란다에 나와 서 있었다. 얼음이 찰랑이는 일회용 컵을 손에 들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일과를 마치고 난 후에야 내린 이 비가 고마웠다. 오전 내내 축적되었던 무언가가 차분히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문득 미소가 떠올랐다. 오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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