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9.덜어내야 가벼워지고,
비워야 다시 채워진다.

by 마부자

침대에서 일어나 잠시 가볍게 몸을 풀고 거실로 나가 창문 앞에 섰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져 내리는 빛은 숨 쉴 틈 없는 여름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구름 하나 보이지 않은 하늘 아래, 햇살은 몸에 닿기도 전에 따가움을 먼저 전했다. 바람조차 뜨겁다는 말을 실감하는 아침이었다.


그렇게 잠시 날씨를 느끼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명상을 시작했다. 익숙한 호흡과 침묵 사이, 초여름의 아침 기운이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하루를 열었다.


오전엔 독서를 하고, 집 안 곳곳을 정리하며 청소를 했다. 몸을 움직이며 정리하는 일은 언제나 약간의 운동이 된다. 그렇게 조금의 땀이 흐르고 나면 마음까지 조금 가벼워진다.


운동을 마친 뒤에는 짧게 동네 산책에 나섰다. 뜨거운 햇살 아래였지만 그래도 걷고 싶었다. 걷다가 어느 순간, 낯선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앞을 가로질렀다.


느릿하며 재빠르게 내게 다가오더니 다리에 한쪽 빰에 자신의 체취를 남기고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마치 안내라도 하듯. 그때 옆을 마주오던 꼬마아이가 말했다. “아저씨 고양이에요?”


아이의 눈엔 내가 고양이와 함께 나온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옆에 있던 젊은 엄마가 민망한 듯 웃으며, “그냥 친해졌나 보지~”라고 말하고는 나를 향해 짧은 사과의 눈빛을 건넸다.


별것도 아닌 상황인데 이상하리만치 웃음이 났다. 이미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아이와 고양이, 그 잔상만으로도 웃음이 남았다.


초여름 햇살 아래, 그늘이 드리운 벤치에 앉아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무더위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 산책길에 놓인 벤치에 앉아 흐뭇한 미소와 함께 햇살은 뜨거웠지만 그 안에 불어오는 시원한 공기를 듬뿍 가슴에 넣은 산책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미용실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고민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단골 미용사와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전처럼 똑같이 해드릴까요?”


하지만 며칠 뒤 병원에 입원하면 외출도 쉽지 않을 테고, 치료에 집중하려면 이참에 머리를 더 짧게 자르기로 결심했다.


그리곤 미용사에게 말했다.

“오늘은 전보다 훨씬 짧게 해주세요.”


그 말에 미용사가 장난스레 웃으며 대꾸했다.

“뭐 군대라도 다시 가시게요?”


그 순간,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네, 해병대 스타일로 시원하게 잘라주세요.”


농담이라고 하며 미용사가 슬쩍 당황해하며 다시 물었다. 그러나 나는 진심이었다. 웃으며 진짜로 짧게 잘라달라고 말했다.


미용이 시작되고 뭉텅 뭉텅 잘려나가는 내 머리카락을 보며 약간의 남아있는 내 두려움도 잘라내 버렸다. 그렇게 결국 해병대서 근무하는 둘째보다 짧은 머리를 하고 미용실을 나왔다.


반찬가게에 들렸다. 오래 먹으려면 손수 만드는 게 좋지만 이번주말에는 약속도 있고, 다음주가 지나면 내가 집에 없을 것이고, 막내는 내내 학교에서 저녁까지 먹고, 아내만 혼자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 되니 이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반찬 봉지를 손에 들고 집에 돌아와 보니 막내가 일찍 집에 와 있었다. 감기기운이 있어 조퇴를 했다고 한다.

막내는 감기 원인을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난 알 수 있을 것 같다. 몇일 전 녀석이 아침에 등교를 하고 청소를 하려고 방에 들어간 순간 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문을 열자 시원함을 너머 차가운 바람이 밀려나왔다. 막내의 방은 시베리아 한복판에 놓여 있는 것 처럼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밤새 녀석방에 에어컨을 켜놓고 잠을 잔 것이다.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지도 않고 차갑게 잠을 잔데다가 아침에 부랴부랴 나가서 뜨거운 공기를 맞았을 테니, 그 기온차에 아마도 감기가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지금 이순간도 절대로 그 원인은 아니라고 우겨댄다.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저 방에 들어가 푹 쉬라고 말했다.


걸어서 퇴근한 아내는 현관문을 열며 “날씨가 정말 미쳤다”고 짧게 투덜댔다. 그리고는 거실에서 내 짧아진 머리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무 짧게 잘랐어. 아들이 군대에 있다고 당신도 따라가려는 거야?”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났지만, 잔소리는 잔소리대로 들렸다.


저녁 준비가 끝났고, 막내를 깨워 세 식구가 모처럼 평일 저녁을 함께 먹었다. 식탁 위에 놓인 반찬과 짧은 대화들,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지만 그런 평범함이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늘 그렇듯,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하루의 끝을 정리한다.

아주 평범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 또 하루가 담겼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 갔다.

햇살도, 바람도, 웃음도, 그리고 가벼운 걱정 하나까지 내 하루의 일부가 되어주었다.


누군가는 평범하다고 말할 이 하루 안에 나는 뜨거운 계절을 마주했고, 사람과 짐승 사이의 작은 오해에 웃었고, 어쩌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걱정으로 막내의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머리칼을 자르듯 마음도 짧게 다듬어야 할 때가 있다.


덜어내야 가벼워지고, 비워야 다시 채워진다.


오늘 내가 그랬듯, 이 무더운 계절에도 분명 가끔은 이유 없이 웃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는 걸, 그런 순간 하나면 견딜 수 있다는 걸, 잊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