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의 햇살이 암막커튼을 무용지물로 만들 정도로 창가를 압도했다. 오전 11시 이후면 주사 바늘이 팔에 꽂히기에 키보드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나는 그전에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옮겨들고 소파 한켠으로 자리를 옮겼다. 햇살을 등지고 영상을 재생했다. 오늘도 루틴처럼 영상으로 책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시청한 영상은 하대 작가와 고명환 작가가 함께 진행하는 북토크 <하고 만다>였다. 오늘 소개된 책은 고명환 작가가 새로 펴낸 <고전이 답했다: 마땅히 가져야 할 부에 대하여 무엇을 기다리는가>였다.
영상의 주제는 “당신에게는 기세가 있는가?”였다. 제목에서부터 내 의식을 뚫고 들어온 기세라는 단어에 집중하며 시선을 고정한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따라갔다.
기세.
자주 쓰는 단어는 아니지만, 그 말은 어떤 강렬함을 내포하고 있다. 말 그대로 ‘기운의 세기’를 뜻하지만, 단순한 활력 이상의 의미가 있다.
기세는 어떤 움직임에 동반되는 흐름이자 압력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작용한다.
생각해 보면 기세라는 단어는 결국 타인을 향해 쓰는 표현이기보다는 나 자신을 향해 던지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 참 기세가 좋아 보이네”라고 말하지만 그런 평가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불과하다.
실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기세는 내 안에서 느끼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지금 너에게는 기세가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외부의 시선이나 평가가 아니라 내 안에서의 확신이 기세의 출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문득 나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 기세 좋은 사람일까? 이 질문은 아주 조용하게 다가오지만 그 여운은 크다.
단지 하루가 버겁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뭔가 내 안의 흐름 자체가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몸을 움직이고는 있지만 방향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결국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그럴듯한 말을 하고는 있지만 그 중심이 내게 없다면 그것은 아마 기세가 꺾인 삶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세란 무엇으로 생기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 걸까. 누군가는 그것을 성취나 열정, 또는 체력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 있어 기세란 그런 외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어떤 흐름이다.
내가 가야 할 방향을 또렷하게 알고 있을 때, 그 방향으로 나를 믿고 움직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내 안에 기세라는 것이 살아난다.
병이라는 사건은 내 삶의 방향을 단숨에 바꾸어 놓았다. 무언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던 시간은 갑작스레 정지했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고요한 정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입원 첫날 나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말했다. 치료는 싸움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고통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지나가야 할 파도라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통과하고 있지만 그 말들을 반복할수록 가끔은 정말 내가 잘 가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몸은 약해지고 계획은 흐릿해지고, 생각조차 느려질 때면 나는 또다시 내 안의 기세가 꺼지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치료를 하고 영상을 보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루틴을 지키려 한다.
그 작은 루틴을 지키는 일이야 말로 지금 내가 기세를 회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세란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작은 방향성을 잃지 않으려는 일상 속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하루에 단 한 문장이라도 쓰고 한 장의 책을 넘기려 애쓴다.
이는 나를 위한 아주 조용한 반격이다. 병은 내 육체를 멈추게 했지만 나는 나의 흐름을 완전히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여전히 기세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의 방향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타인의 응원이 아니라 내 안의 질문 앞에서 다시 일어서는 일이다. 내가 나에게 묻는다.
지금 너에게는 기세가 있는가. 그리고 아주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인다. 흐름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나는 멈춘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고.
나는 오늘 ‘기세’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기세는 내가 나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강한 에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