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4.삶은 무언가를 앗아가면서
동시에 위안을 준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15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예전 불면증으로 한참 고생하던 시절, 신경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불면에도 세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


잠에 들지 못하는 불면,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불면, 그리고 짧은 수면 뒤 다시는 잠들지 못하는 불면.


나는 그중에서도 첫 번째, 쉽게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틀에 갇혀 있다. 밤이 깊어가는데도 정신만 말똥말똥하고 몸은 바닥으로 꺼져가는데 의식은 끝없이 맴돈다.


어제까지 이틀 동안 고작 세 시간을 쪼개 자며 버텼다. 그리고 맞이한 삼일째 저녁, 10시가 되자 지친 몸을 그냥 눕혀버렸다.


다행히도 곯아떨어진 듯한 잠이 찾아왔다. 눈을 떠보니 새벽 1시. 오랜만에 이어진 세 시간의 깊은 잠이었다.


목은 바싹 말라 있었고 화장실을 다녀와 다시 눈을 감아보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로는 끊어낼 수 없는 생각의 꼬리들이 꼬리를 물며 나를 흔들어댔다.


이 생각이 끝나면 저 생각이 이어지고 다시 또 다른 불안이 덧씌워졌다.


결국 새벽 4시, 잠자리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켜 서재로 향했다. 창밖에는 아직 빛이 오지 않은 새벽이었고 마음속에서는 어두움과 작은 불빛이 동시에 흔들렸다.


불면의 밤은 여전히 내 곁에 있었지만 적어도 그 시간을 글로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희미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아직 빛은 오지 않고 가끔 스쳐가는 자동차 소리만이 고요한 새벽을 깨우고 있었다. 책꽂이 한편에서 오래전 형광펜 자국이 남아 있는 책을 꺼내 들었다.


그 흔적을 따라가며 ‘평균’이라는 단어에 대한 짧은 생각을 적었다. 동쪽에서 햇살이 밀려 들어오고 현관을 나서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며 하루가 시작되었다.


어제 새롭게 손에 든 책은 끝까지 읽어 서평 초안을 마무리했고 오전 11시에는 짧은 운동 루틴을 이어갔다. 몸이라는 것은 참 신비롭다.


월요일에 첫 스쿼트와 팔굽혀펴기를 시도했을 땐 허벅지와 겨드랑이가 저려올 정도로 근육통에 시달렸다.


그런데 4일째 되는 오늘, 같은 횟수의 운동을 했음에도 아픔보다는 오히려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예전에 비하면 고작 1/5의 운동량이지만, 통증이 줄어드는 변화처럼 치유의 과정도 그렇게 천천히 내 안에서 자라날 것이라는 확신이 스쳤다.


운동을 마치고 샤워실 전신 거울 앞에 섰을 때, 줄어든 몸이 여전히 낯설게 다가왔다.


목에 찾아온 불청객으로 인해 지난 수개월 동안 이어진 고통과 불편이 스쳐갔다. 하지만 오늘 거울을 보며 의외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방사선 치료를 받은 이후로 면도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콧등 아래 삐죽 솟은 몇 가닥의 수염을 보며 문득 떠올려보니, 면도를 멈춘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늘 하루만 면도를 거르면 거울 속에는 뾰족한 수염이 가득했고 나이 들어 더 굵어진 수염은 전기면도기로는 감당할 수조차 없었다.


딸에게 레이저 시술을 권유 받아 이번 겨울 시술 계획까지 세웠던 내가 지금은 놀라울 만큼 말끔한 턱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방사선이 모공을 죽여버린 탓일 거라 생각하니 인체에 미치는 해로움이 분명히 실감되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예기치 못한 장점이 내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삶은 그렇게 늘 무언가를 앗아가면서 동시에 작은 위안 하나를 던져준다. 오늘 내가 마주한 말끔한 턱이 바로 그 증거였다.


뜻밖의 고통이후에 찾아온 것은 뜻밖의 편안함이었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면도기를 들던 습관이 사라지자, 불편함 대신 시간이 생겼고 그만큼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치료가 남긴 흔적 속에서조차 이렇게 작은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은 묘한 위로가 된다. 어쩌면 인생은 거대한 기쁨보다는 이런 사소한 위안들에 의해 버텨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몸의 상처가 줄어들고 조금씩 돌아오는 미각처럼 마음의 무게도 이렇게 조금씩 덜어져 나가길 오늘도 조심스럽게 소망해 본다.

이전 03화09.03.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내겐 회복의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