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5.한권의 동화가 내게 건넨
눈물과 빛의 시간.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16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아직 모두가 잠든 새벽. 이제는 루틴이 되어버린 몸을 일으켜 서재로 향했다. 새로운 책을 완독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묘한 충만감이 밀려왔다.


당분간은 어렵고 묵직한 책보다 가볍게 읽히는 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다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장르가 어린이 동화였다.


장바구니에 담기 전 잠시 주저했지만, 후기를 찾아 보니 “동화이지만 어른에게도 충분히 깊은 울림이 있다”는 평이 많았다. 그렇게 선택한 책이 루리 작가의 <긴긴밤>이었다.


새벽 별빛을 벗 삼아 읽기 시작했다. 코끼리 동물원에서 자라는 코뿔소의 이야기로 시작된 이 동화는 단순한 우화가 아니었다.


새벽 1시에 첫 장을 열고, 4시 즈음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나는 여러 번 눈시울을 붉혔다.


특히 북부흰코뿔소 ‘노든’의 아내와 딸, 그리고 유일한 친구가 차례로 죽음에 이르는 장면에서는 차갑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평생 눈물 많지 않은 사람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지난 52년의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눈물 뒤에는 억눌린 분노가 밀려왔다. 멸종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 때문이다.


책속의 주인공 북부흰코뿔소는 실제로 2018년 죽은 마지막 수컷 ‘수단’이라는 존재였다. 이제 전 세계에는 암컷 두 마리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인간의 탐욕이 만든 비극이었다. 코뿔소 뿔 하나를 둘러싼 허영과 돈벌이 때문에 수많은 생명이 학살당했다.


멸종은 한순간에 오는 재앙이 아니다. 서식지 파괴, 무분별한 사냥, 불법 거래가 오랜 시간 쌓여 완성된 결과였다.


초원에서 무리를 이루던 거대한 생명체가 이제는 동화 속 기록으로만 남을 위기에 놓였다는 사실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생각했다. 멸종은 단지 코뿔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는 거대한 연결망이고, 한 종의 사라짐은 곧 수많은 연결고리의 붕괴가 아닐까.


언젠가는 그 대상이 인간일지도 모른다. 문명의 편리를 좇아온 대가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 새벽의 고요 속에서 선명해졌다.


책장을 덮고 한동안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멸종이라는 단어는 ‘끝’이 아니라 ‘경고’라고. 그것은 내 투병의 시간과도 겹쳐 보였다.


몸속의 암세포도, 지구의 멸종 위기도 모두 작은 균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무심히 지나친 습관, 무분별한 선택, 조그만 욕심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어두운 새벽, 나는 동화 한 권을 읽고서 오래 울고 오래 분노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희망을 스스로에게 새겨 넣었다.


멸종의 경고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묻는 일. 그것이야말로 내가 다시 살아가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분노와 슬픔에 잠겨 있던 창가에도 어느새 동쪽 햇살이 조심스럽게 서재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두웠던 새벽은 물러나고, 빛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출근 준비를 하던 아내가 퉁퉁 부은 내 눈을 보고 “또 한숨도 못 잤느냐, 더 아파 보인다”며 걱정 섞인 말을 건넸다.


순간, 책을 읽다 울어서 그렇다고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웃으며 “조금 쉬었다가 자보려 한다”고 대답했다.


조용해진 오전, 그러나 달아난 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간단히 아침을 먹고 비몽사몽한 몸을 이끌어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새벽 내내 붙잡았던 감정을 차분히 추스르며 글로 옮겼다. 그렇게 얇은 동화 한 권이 내 안에서 무겁고도 단단한 감정을 일으켜 세웠다.


한밤중에 스친 눈물과 분노가 글로 정리되는 순간, 그것은 비로소 나를 조금 더 두텁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 되었다.


오늘 새벽에 만난 한 권의 동화는 단순히 책으로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내 안의 오래된 감정들을 건드려 눈물을 불러내고 동시에 분노와 자각을 선물했다.


멸종이라는 거대한 단어 앞에서 나는 인간의 욕망과 책임을 떠올렸고 투병의 과정 속에서 마주한 나의 작은 균열들과도 겹쳐 보였다.


아직은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과 무거운 새벽이 이어지고 있지만 책을 통해 다시 마음을 붙들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위안이었다.


어쩌면 울고 나서 비워진 마음자리에 다시 채워지는 건, 조금 더 단단해진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일기는 그렇게 한 권의 동화가 내게 건넨 눈물과 빛, 그리고 다시 살아갈 이유를 새겨주었다는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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