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1.작은 불편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상회복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22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기쁨에 잠시 이성을 잃었다.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미각을 알면서도 햄버거와 삼겹살을 입에 넣었다.


결국 늦은 밤 찾아온 소화불량과 변비는 내 몸이 아직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뒤척이다 간신히 해결을 본 후 자정을 넘겨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다행히 곧바로 깊은 잠에 빠졌고 새벽의 차가운 기운에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이미 새벽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려 네 시간을 연속으로 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만큼 내 몸은 긴장과 피로에 짓눌려 있었던 것이다. 대중교통을 타고 병원 로비에 서서 기다렸던 시간들, 아직은 낯선 일상으로의 복귀가 내 몸을 여전히 무겁게 만들고 있다.


불면을 이길 만큼 피로가 쌓였다는 건 역설적으로 내 몸이 아직 치유의 과정 속에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몸은 솔직하다.


무너지는 순간도 회복을 향해 조금씩 걸어가는 발걸음도. 나는 그 몸의 신호를 이제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눈을 감는 순간부터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해야 할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결국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차가운 새벽 바람을 맞았다. 아파트 빌딩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별빛이 낯설게 다가왔다. 그 작은 빛을 바라보며 명상으로 호흡을 고르고 곧장 서재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어제 새벽에 펼쳤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여전히 놓여 있었다. 표지 위에 가만히 손을 얹자 ‘반전’이라는 단어가 다시 머릿속을 맴돌았다.


삶의 흐름은 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그 낯선 방향 전환 속에서 나는 오늘도 배운다.


짧은 글로 생각을 적고 나니, 서재의 커튼 사이로 동쪽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옅은 햇살이 창가를 스치며 새로운 하루를 알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아내와 막내의 알람이 울렸다. 두 사람은 분주하게 하루를 준비하고 현관을 나섰다. 익숙한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삶은 계란과 통밀빵, 앤커버와 야채주스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어제 하루의 일탈은 지나갔으니 오늘부터는 다시 지켜야 할 식단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행인 건 이제 계란도 통밀빵도 그 본연의 맛을 조금씩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주 작은 변화일지라도 내 몸은 천천히 회복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달 전, 오랫동안 사용하던 비데의 렌탈 기간이 종료되었다. 코디가 새 제품으로 연장하라며 혜택을 설명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카드 실적을 엮어 월 8,000원에 사용할 수 있다고 했지만 매달 30만 원을 써야 한다는 조건은 내겐 부담이었다. 기존의 비데는 잘 사용하지 않는 안방에 설치하고 인터넷으로 후기가 좋은 제품을 하나 새로 주문했다.


오늘 오전은 온전히 그 새 비데를 설치하고 옮기는데 쓰였다. 기존 제품을 해체하고 배관을 다시 연결한 뒤 전기를 꽂는 순간,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정상 작동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해 전 렌탈했던 구형 모델에는 없던 쾌변 기능이 새 제품에는 탑재되어 있었다. 변비에 시달리는 내게는 그 기능 하나만으로도 절실한 위안처럼 다가왔다.


설치를 마치고 첫 시험을 해본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떼어 낸 비데는 다시 안방 화장실로 옮겼다. 기존 변기커버를 떼어내고 새로 연결한 뒤 전원을 꽂자 이곳 역시 아무 문제없이 작동했다.


두 공간 모두 깔끔히 정리된 순간, 묘한 성취감이 밀려왔다. 단순히 기계 하나를 설치한 일이 아니라 불편했던 생활의 작은 틈을 메우는 일이었다.


사실 손재주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름 기계를 만지거나 고치는 것을 좋아해서 어지간한 집안의 가전제품이나 심지어 자동차도 부품만 있다면 직접 수리를 하며 지내왔다.


그러나 투병기간중에 체력이 소진되고 몸이 정상이 아니다 보니 모든 것이 귀찮고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어 한 동안 직접할 의욕도 자신감도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몸이 회복 중이고 이렇게 사소한 불편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체력을 되찾고 있다는 작은 사실만으로도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운동을 마치고 점심을 먹은 뒤 잠시 소파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 다시 서재로 돌아와 새 책 한 권을 펼쳤지만 열 페이지도 채 넘기기 전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새벽 네 시부터 깨어 오전 내내 비데 설치로 인해 바빳던 몸의 피곤함이 밀려온 것이다.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켜 침대로 향했다. 그렇게 두 시간 남짓의 꿀 같은 낮잠에 빠졌다.


정말 오랜만에 깊은 단잠을 잤다. 이런 잠은 단지 휴식이 아니라 몸이 스스로 회복을 위한 시간을 찾아내는 지혜 같았다.


깨고 나니 머리가 한결 맑아졌고 다시 하루를 이어갈 작은 힘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기분 좋은 느낌에 몸을 일으켰다.


단히 집안을 정리하고 퇴근한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특별할 것 없는 식탁이었지만, 오랜만에 나눈 대화와 웃음이 소소한 풍성함을 더했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며 나는 다시금 느꼈다. 오늘 하루는 길었지만 내게 달콤한 꿀잠이라는 선물을 남겨주었다는 것을.


몸은 여전히 회복 중이고 마음도 때때로 흔들리지만 결국 이렇게 하루를 살아내고 잠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고마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