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9.셰익스피어의 비극들 속에
확인된 한가지 진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38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아침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며 몸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기운은 작은 바람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그 바람이 내게 가져다준 건 단순한 추위가 아니라 회복되어가고 있다는 명확한 감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차가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몸을 일으켰다.


투병 이후 특별한 약속도 특별한 사건도 거의 없다. 늘 같은 하루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일주일은 이전보다 훨씬 더 빨리 흘러간다.


시간이 빠르다는 건 어쩌면 내가 여전히 삶을 붙잡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서재 창문을 열고 명상을 시작했다. 어두운 새벽 하늘 너머 팔공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몸을 감싸고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의 소리가 내 귓가에 스며들었다.


이른 아침의 풍경이 내 안의 침묵과 겹쳐졌다. 그리고 책장 속에서 <오십에 읽는 손자병법>을 꺼냈다.


이번 한 주는 손자병법을 곁에 두고 내 삶의 전략을 다시 세워보기로 했다. 무엇을 시작하든 본질을 돌아보는 시간이 먼저 필요했다. 그래서 오늘 내 생각을 이끈 단어는 ‘본질’이었다.


아내는 이번 주 단 나흘만 출근하면 긴 연휴가 기다린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길에 올랐다. 나는 그런 아내를 배웅한 뒤 반복되는 루틴의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막내와의 작은 해프닝에서 시작된 여정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비극 <오셀로>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나의 무지로 인해 ‘로미오와 줄리엣’이 4대 비극에 속하는지 의심하며 시작된 여정이 6개월 만에 끝이 났다.


오셀로는 다른 세 작품과는 또 다른 결이 있었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의심과 욕망이 어떻게 파멸로 이어지는지를 차갑게 보여주었다.

사랑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의심이 결국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책을 읽는 동안 문득 내 안에도 여전히 오셀로 같은 그림자가 있음을 깨달았다.


치료가 끝났음에도 완치라는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다시 병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의심이 나를 잠식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데스데모나가 끝까지 사랑을 말했지만 남편의 귀에 닿지 않는 장면은 내 가슴을 오래 붙잡았다. 그 순간, 묵묵히 내 곁을 지켜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사랑을 나는 과연 얼마나 온전히 믿고 받아들였을까. 의심은 사랑을 갉아먹고 불안은 회복의 속도를 늦춘다는 사실을 오늘 오셀로를 통해 뼈저리게 배웠다.


돌이켜보면 의심과 불안은 언제나 가장 은밀하고 끈질기게 나를 잠식해왔다.


병원 복도를 오가던 시간, 검진 결과를 기다리던 순간, 혹은 새벽의 고요 속에서 홀로 몸의 이상 신호를 감지할 때마다 불안은 작은 균열처럼 스며들었다.


그 균열을 오래 붙잡으면 내 안의 모든 풍경이 어둠으로 덮였다. 결국 불안은 나를 지켜내지 못했다. 오히려 회복을 더디게 만들었고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도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반대로 믿음과 사랑은 언제나 묵묵히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내의 짧은 웃음 속에 자식들의 아무렇지 않은 일상 이야기 속에 책 한 권을 읽는 사소한 순간에도 그것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다만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오셀로가 끝내 데스데모나의 사랑을 의심하고 외면했던 것처럼 나 역시 가까이에 있던 믿음을 온전히 붙들지 못한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삶은 길지 않고 앞으로의 시간은 더욱 그렇다.


의심과 불안에 끌려다니며 남은 날들을 소진할 것인지 아니면 믿음과 사랑을 선택해 조금은 더 단단하고 따뜻한 하루를 쌓아갈 것인지. 답은 이미 알고 있다.


내게 남은 시간은 후자여야 한다. 불안을 손에 쥐고 살아가는 삶은 이미 충분히 겪어보았다. 이제는 그것을 내려놓아야 할 차례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비극들 속에서 결국 한 가지 진실을 확인했다. 비극은 언제나 인간이 스스로 만든 의심과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


그렇다면 내 삶의 마지막은 더 이상 비극이 아니라 희망으로 향해야 한다. 내가 믿음을 선택하는 순간 사랑은 다시 나를 살리고 불안은 더 이상 내 안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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