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오렌지 색 귤에서 묘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by 마부자

아직은 어두운 새벽 공기가 서늘하다 못해 살을 베는 듯했다. 눈도 비도 내리지 않았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흔들리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만 봐도 겨울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날은 괜히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기 마련이지만, 따뜻한 차한잔과 함게 책상 앞에 앉아 가슴을 활짝 펴고 책장을 주욱 훑어 보았다.


지난주까지 명랑한 은둔이라는 단어를 통해 혼자 있음의 색다른 접근을 깨닫게 해준 단순생활자를 제자리에 넣어두고 새로운 책을 손에 들었다.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오랜만에 다시 책을 펼치고 낙관이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정리하며 아침을 맞이했다. 아내와 막내가 현관을 나서고 창밖을 보니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었다.


바람은 차지만 잠시 햇볕을 쬐고 집 인근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 따뜻한 캔커피를 하나 사서 들어가려고 문을 열었다.


자주가는 단골 편의점 사장님께서 내 얼굴을 보며 “건강은 좀 어떠세요?” 하고 묻는다. 생각보다 선명하게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의외로 크게 다가왔다.


그 한마디에서 오래 알고 지낸 사람만이 줄 수 있는 다정함이 느껴졌다.


“잘 회복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하고 짧게 답을 하고 카드를 내밀었다. 그런데 사장님께서 “이거 하나 드셔보세요.” 하며 귤 세 개를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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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 아닌데도 그 전해지는

오렌지 색 귤 세 개에 묘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차가운 바람 속에 불쑥 들어온 한 줌의 온기 같아서 괜히 혼자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런 순간들은 늘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서 찾아오는 듯하다. 마치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세상은 여전히 차갑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작은 방식으로 서로를 데운다.


집에 도착해 잠시 한숨 돌리려던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어제 첫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오늘 정상 등교까지 한 막내가 환한 얼굴로 들어왔다.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아직은 쌩쌩한데요?” 하고는 특유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제 일을 물었더니 돈까스를 직접 만들어야 해서 실수를 좀 했다고,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잘하게 되지 않겠냐며 씩 웃었다.


처음 일을 배우던 그 누구나 겪는 서툼과 긴장, 그리고 그 와중에도 견뎌내는 어린 마음의 단단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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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면 누구나 아이에게 조언의 말을

건네고 싶은 순간이 이런 때일 것이다.


‘직장 생활이라는 게 말이지…’라는 문장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나 스스로를 붙잡았다.


이 말을 꺼내는 순간 나는 꼰대가 된다. 그래서 짧게 “그럼, 당연하지.” 하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등교를 하고 평생 해보지 못한 낯선 알바까지 분명 피곤할 텐데 좀 쉬라고 하니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며 가방을 던져놓고 곧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그 가벼운 발걸음을 보며 ‘역시 아직은 쌩쌩한 나이구나…’ 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저 나이 때의 체력은 도무지 따라갈 수 없다는 걸, 이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


바람은 하루 종일 차갑게 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더 따뜻해졌다. 편의점에서의 작은 친절과 막내의 밝은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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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것도 거창하지 않았지만,

이런 순간들이 모여 오늘 하루는 충분히 유쾌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하루를 다시 맞이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낀다.


사소한 미소들이 나를 계속 앞으로 걸어가게 해주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의 겨울 바람은 차갑기만 했지만,

나는 묘하게 따뜻한 하루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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