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내게 찾아와 용기를 주었던 무지개가 오늘 다시 내게 찾아왔다.
금주 9일째, 오늘도 어김없이 내 루틴으로 시작했다. 명상, 목표 읽고 쓰기, 그리고 누군가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댓글을 남기는 작은 실천들과 함께 시작하는 아침 공기는 확실히 이전보다는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많은 자기계발 전문가들은 하루에 100번씩, 그것도 100일 동안 목표를 쓰는 것을 권장한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어떤 의식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싶다. 내가 자주 보는 유튜브 채널 "하와이 대저택"의 작가 역시 이 방법을 강력히 추천한다. 그의 말은 언제나 확신에 차 있다.
"목표를 반복해서 쓰다 보면 반드시 그것을 이루게 될 겁니다."
그는 그 신념을 단호하게 강조한다. 듣고 있으면 그 확신이 묘하게 전염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100번이라는 숫자가 부담스러웠다. 단순히 목표를 적는 행위가 아니라, 매일 같은 말을 100번씩 적는다는 건 어쩌면 자기와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그런 꾸준함은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시도해 보겠다고 결심했다가, 그 과정의 막막함에 밀려 발을 떼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런 내가 달라진 건, 지난달 5일이었다. 퇴사 후 약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평소처럼 운동을 하며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날따라 영상 속 작가의 말이 이상하리만큼 귀에 꽂혔다. "한 번이라도 써보세요. 그 작은 시작이 당신의 모든 것을 바꿀 겁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어떤 스위치가 딸깍하고 켜졌다.
마음속에서 반쯤 잊고 있던 결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이번에는 해보자.' 꼭 100번이 아니어도 좋다.
일단 시작해 보자고. 내 손으로 내 목표를 적는 순간, 그것이 어떻게든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데려갈 것 같았다.
적어도 그날, 나는 과거의 나보다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용기 하나로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왜 그런 충동이 갑자기 내 머릿속을 밀고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무작정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 열정이 내 손끝을 끝없이 움직일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 있을 때는 마치 바다처럼 넓은 꿈과 목표들이 넘쳐났던 것 같은데, 막상 글로 적으려니 그 광활함은 점차 좁아졌다.
사실 "없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이 없었다기보다는,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이건 막연히 꿈꾸던 목표를 내 손으로 직접 잡아내야 하는 작업이었다. '내가 원하는 게 이거다!'라고 머릿속에서는 뚜렷했지만, 막상 그것을 글로 옮기는 과정은 복잡하고 모호했다. 나는 글을 적는 동안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목표를 정했다고 자부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채 마음속 어딘가에 부유하고 있었음을.
그날, 나는 비로소 전문가들이 왜 손으로 목표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지 깨달았다. 머릿속의 생각과 손끝으로 적는 행위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내가 손으로 직접 글자를 쓰는 그 과정이야말로 내 생각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첫걸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긴 호흡을 갖고 나의 목표를 단계별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2030년이라는 먼 미래를 설정했다. 그곳에서 내가 생각하는 '성공'은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흐릿했던 목표가 종이에 적히는 순간 점점 또렷해졌다. 그리고 그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올해부터 당장 실천해야 할 일들을 나열했다. 하루 단위, 월 단위, 그리고 연 단위로 쪼개 나가며 마치 퍼즐을 맞추듯 내 성공의 청사진을 완성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트를 나는 조심스레 "성공노트"라 불렀다. 종이를 손에 쥔 순간, 그것은 단순한 목표 목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삶의 지도였다. 내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글자들이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기대감이 넘쳤다.
정확히 한 달 전, 12월 9일. 나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동안 마음속에서만 맴돌던 "100일 쓰기"를 실천하기로 한 것이다. 하루 100번씩 목표를 적는 일은 시작 전부터 나에게는 지나치게 벅차게 느껴졌다. 예전의 나였다면, '어차피 못할 거라면 시작도 하지 말자'는 생각에 도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행동했다.
"시작이 반이다."
나는 스스로를 설득하며, 부담스러운 목표를 조금 낮추기로 했다. 하루 10번씩, 100일 동안. 그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한 달을 꾸준히 해낸다면, 그때는 자신감을 얻어 하루 100번 쓰기에 도전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작게 쪼갠 목표는 나를 덜 두렵게 했고, 도전은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로써 정확히 한 달, 31일째 되는 날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10번씩 목표를 써왔다. 숫자만 보면 단순한 반복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한 집중과 꾸준함, 그리고 나 자신과의 약속이 담겨 있다. 오늘도 목표를 다 적은 후, 한 달 동안 써왔던 한 가지 목표를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그 순간, 마음 한켠에서 뭉클함이 차올랐다. 내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마음과 더불어 이 단순한 행위가 내 삶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 깨달으며 눈가가 뜨겁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비록 지금은 100일의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이 여정이 내게 준 성취감은 이미 꽤나 깊고 묵직했다.
문득 생각했다. 만약 내가 정말로 100일을 완성한다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그것은 단순한 뿌듯함을 넘어선 감정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을 꼭 느껴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생겼다. 이제 69일이 남았다. 길게만 느껴졌던 시간이 어느새 현실적인 숫자로 다가왔다.
더불어, 하루 100번 목표를 쓰는 그 순간이 떠올랐다. 지금은 상상 속의 도전이지만, 이 한 달의 기록 덕분에 나는 그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으리란 믿음을 얻게 되었다. 목표를 적는 매 순간, 나는 그것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목표가 적힌 노트는 더 이상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이루고 싶은 모든 것의 씨앗이 되고 있다.
나는 100일을 완성하고 싶다. 아니, 반드시 완성하겠다. 그리고 그날, 100번 쓰기를 시작하며 또 다른 목표를 꿈꾸고 있는 나를 만날 것이다.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신념은 지금 내 안에서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나는 오늘 아침, 나 자신과 다시 한번 약속했다. 단순하지만 강렬한 다짐이었다.
"난 의지가 있다. 난 이겼다. 난 할 수 있다."
이 말들은 공허한 구호가 아니었다. 31일 동안 쌓아온 작은 승리들이 만들어준 믿음이었다. 그 믿음은 나를 다음 목표로 향하게 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하루 10번씩 목표를 적는 일이었다. 작고 사소하게 보였던 이 습관은 어느새 나의 하루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그저 도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루틴이 되었고, 그것은 내 자신에 대한 신뢰를 만들어 주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100번 쓰기? 이제 문제없어."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 작은 시작이, 이 작은 성취가 앞으로 나를 얼마나 더 큰 곳으로 데려갈지 기대와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다.
습관은 신뢰를 만들었고, 신뢰는 도전의 용기를 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앞으로 69일 동안의 여정을 끝까지 완주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목표를 적으며 또 다른 노트를 열어갈 것이다.
이 작은 습관에서 시작된 나의 여정은 결코 작은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 안에서 꿈틀대는 확신이었다.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이 뿌듯한 감정 속에서 문득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 책장에는 얼마 전 주문한 새 책들이 두 권 정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내 시선을 끈 건 그 책들이 아니었다. 책장 한 구석에서 한 권의 책이 마치 내 이름을 부르듯 속삭이고 있었다.
그 책은 단순히 나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그것은 천연색 빛을 내며 살짝 어두운 내 방 서재를 일곱 가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그 책은 나를 향해 속삭이는 듯했다. "나를 꺼내라. 지금이 바로 나와 대화할 순간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그 책을 꺼내 들었다.
차동철 신부의 <무지개 원리>.
책을 책상 위에 올리며 나는 잠시 미소 지었다. 이 책은 이미 두 번이나 읽은 책이었다. 하지만 오늘 다시 읽으면 세 번째가 되는 이 책은 내게 있어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었다. 이것은 마치 오래된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다. 늘 내 삶의 중요한 순간에 곁에 있었고, 나를 일으켜 세워준 책이었다.
<무지개 원리>는 단순히 내용으로 나를 감동시키는 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필요한 순간마다 내게 대답해주는 동반자 같았다. 세 번째라고 해서 그 가치가 줄어들 리 없었다. 오히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새로이 발견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책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 책은 왜 이렇게도 나와 특별한 인연이 닿아 있는 걸까? 몇 번이나 이사를 하고, 책장을 정리할 때마다 다른 책들은 떠났지만, 이 책만은 늘 나와 함께였다. 어떤 순간에도 나는 이 책을 버리거나 잃어버릴 수 없었다.
<무지개 원리>는 나의 일상에 스며 있는 하나의 원칙이었다. 그 안의 메시지는 나를 다시금 정돈하게 하고, 무너질 때 붙잡아 주었으며,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 책은 내게 있어 단순한 물건을 넘어섰다. 그것은 내 삶의 어떤 부분이었다.
다시 한번 책장을 넘기며 나는 기대했다. 이번에는 어떤 새로운 깨달음이 내게 다가올지. 무지갯빛의 책이 내게 전해줄 이야기는 이미 세 번째라는 숫자를 넘어섰다. 이제는 그 책이 내게 선물할 또 다른 빛을 기다리며 천천히 읽어나가기로 했다.
이 책과의 첫 만남은 2007년이었다. 이제는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또렷하다. 당시 나는 회사에서 양산으로 발령이 나 낯선 환경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익숙했던 모든 것이 멀어지고, 낯설고 차가운 공간 속에서 나는 홀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낯선 환경 속에서 향수병에 걸렸고, 적응하지 못한 채 본사로 돌아가기를 선택했다.
바로 그 시기에 이 책을 만났다. 매일 답답한 현실과 싸우면서, 어딘가에서 나를 구원해 줄 무언가를 찾던 시절이었다. <무지개 원리>는 그런 나를 부드럽게 감싸주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지금 이 순간을 견뎌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책은 말없이 그렇게 나를 응원해 주었다.
두 번째 만남은 그로부터 5년 뒤, 2012년이었다. 오랜 직장생활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매너리즘은 나를 나태하게 만들었고, 내 일상은 점점 무색해졌다. 결국 나는 다시 한번 변화를 결심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부동산 임대업이라는 새로운 길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 앞에서의 불안감은 생각보다 컸다. 그때 나는 다시 이 책을 펼쳤다. 첫 만남 이후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책은, 새로운 도전 앞에서 내게 또 한 번 용기를 주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와 함께, 나는 이 책에서 묘한 평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 오늘이었다. 그로부터 13년이 흘렀다. 나는 이제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과 함께 나는 이 책을 다시 펼쳤다. 이 순간은 단순히 추억 속의 책을 다시 읽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내가 연결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여러 차례 이사를 했다. 대구로 다시 내려오며 환경이 몇 번씩 바뀌었고, 많은 것들이 버려지고 사라졌다. 그러나 이 책만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가끔은 이 책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책에 의지하며 함께 살아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지개 원리>는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여정을 기록한 일기였고, 내 인생의 지도였다. 나는 책장을 넘기며 생각했다. 이 책을 지금까지 간직해 온 내 자신이 대견스럽다고. 그리고 그런 나를 지켜봐 주듯,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준 이 책이 참 고맙다고.
이 책은 단지 글자와 종이로 이루어진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붙잡아 준 손길이었다. 내가 넘어질 때 일으켜 세워 준 어깨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곁에서 나의 꿈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내 앞에 놓인 이 책은 마치 내 인생 그 자체였다. 이 책을 펼칠 때마다 나는 지난날의 나를 만날 수 있었고, 그 페이지 속에는 나의 도전, 불안, 성취, 그리고 희망이 담겨 있었다. 이 책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일깨워 주고, 내 삶의 길을 밝혀 주는 마법 같은 존재였다.
책에 손을 얹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날의 기억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긴 여정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는 듯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나와 소통하고 있었다. 이 책은 단순히 내가 필요할 때만 곁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마치 나의 삶을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내가 손을 내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첫 장을 펼쳤다. 낯익으면서도 새로운 글자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이미 익숙했지만, 오늘 다시 읽는 이 순간, 그것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책 속의 한 글자, 한 문장을 내 눈으로 읽고, 머릿속으로 담으며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모든 변화와 깨달음은 결국 내가 선택한 작은 행동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오늘 내가 이 책의 첫 장을 다시 펼친 것도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내 인생에서 또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이 책은 언제나 그랬듯, 다시 나를 새로운 여정으로 안내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길 위에서 다시 성장하고, 내 삶을 더 단단히 세워 나갈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책과 함께 또 한 번의 대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화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나를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다.
오전 10시쯤, 평소 같으면 한참 꿈속에 있을 막내가 씻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친구들과 함께 1박 2일로 포항에 여행을 가는 날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에 마음껏 놀고 싶다고 했고,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아니,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막내가 말한 “고3이 되면 공부만 할 예정”이라는 그 다짐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내가 기대하는 건 정직하고 성실하게 책상에 앉아 집중하는 모습이지만, 아이가 생각하는 건 틈틈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차이를 애써 모른 척했다. 어쩌면 지금 그가 누릴 자유를 막지 않는 것이 부모로서의 또 다른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넷이 함께 가고, 기차를 이용한다고 했다. “기차는 안전하고, 친구들과 함께라면 괜찮겠지.” 그런 생각으로 쿨하게 허락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의 지나친 걱정과 불안을 아이에게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아이의 설렘을 무겁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안전하게 잘 다녀와라." 짧은 인사 한마디를 던지며, 내 마음속의 복잡함을 숨겼다.
포항은 날씨가 꽤 추울 텐데, 막내는 그것도 신경 쓰지 않고 여행 준비로 들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KTX로 이동하고, 도착해서 얼마 안 되는 곳에 풀빌라를 예약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안도했다. 도착하는 중간중간 연락을 주고받기로 약속한 후, 막내는 설레는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대구에서 포항까지는 차로 1시간 조금 넘는 거리였다. 잠시 고민했다. 차로 데려다 주는 편이 안전하지 않을까?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꿨다. 기차를 타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떠나는 그 시간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날씨는 춥지만, 아이가 그 추위조차도 설렘으로 덮을 수 있을 만큼 들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한 걱정으로 아이의 자유를 막고 싶지 않았다.
“잘 다녀와라.”
현관 앞에서 나는 막내를 배웅했다. 여행 가방을 메고 신발을 단단히 신은 아이가 문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마음이 묘해졌다.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이 여정은 단순히 여행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는 듯했다. 이 작은 모험은 그가 더 넓은 세상을 스스로 경험하고,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나누며 성장해가는 과정일 것이다.
문이 닫히고, 적막이 깃든 현관을 뒤로 한 채 다시 책상에 앉았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유난히 조용하게 느껴졌다. 아이가 떠나기 전까지는 그 준비 과정의 부산함 속에 묘한 에너지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공백이 고요로 다가왔다.
나는 책상 위의 책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 막내가 기차 안에서 웃고 떠들며 느끼고 있을 설렘처럼, 나도 한때 그런 설렘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그러면서 문득 깨달았다. 아이를 떠나보내며 느끼는 허전함은 단순히 그 공백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나도 그 나이였던 때의 내 자신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결국, 떠나는 이나 남겨진 이 모두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아이가 돌아올 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성숙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짧은 시간 동안 내 안에서 무언가를 다듬고 정리하게 될 것이다.
책 속의 글자를 눈으로 따라가며 나는 아이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조용히 바랐다. 아이가 기차 안에서 웃음으로 가득한 시간을 보내기를, 그리고 그 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작은 추억을 가방에 가득 담아오기를.
약 두 시간을 책에 몰두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감탄과 놀라움이 번갈아 밀려왔다. 마치 이 책은 지금의 나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읽기에 딱 맞는 책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깨달음도 스며들었다.
이 책은 18년 전에 발간된 것이다. 그런데 책 속의 내용이 내가 얼마 전 읽었던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성공학 책들에 담긴 메시지와 일치하고 있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 밥 프록터, 빅터 프랭클, 나폴레온 힐, 맥스웰 몰츠 같은 성공학의 대가들. 그들이 전한 가르침과 지혜가 이미 이 책 속에 18년 전에 정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이 책의 저자인 차동철 신부는 이미 18년 전에 이런 인물들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철학과 이야기를 자신의 책에 담아낼 정도로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서야, 이토록 시간이 흘러서야 그들의 이름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이 책을 다시 펼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18년 전의 나는 이 책 속에 담긴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조금 더 많은 경험을 했고, 조금 더 많은 책을 읽었으며, 조금 더 성장했기에 이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단순히 성공학의 대가들이 등장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마주한 깨달음 때문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에는 성공과 삶에 대한 통찰들이 존재해 왔고, 그것을 기록해 전해 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이제야 그 소중한 가르침들을 깨달을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
18년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이렇게 큰 의미를 가질 줄은 몰랐다. 나는 책장을 덮으며 다짐했다. 이 책이 내게 전해 준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하고, 나의 삶 속에서 실천으로 옮기겠다고. 그리고 이 깨달음을 통해 나의 시간과 경험이 쌓일수록, 이 책이 내게 주는 메시지도 더 풍부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약 두 시간을 책 속에 몰입하며, 나는 묘한 감정과 함께 깨달았다. 이 책은 지금 이 시점에 내가 꼭 읽어야 할 책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놀라웠던 것은, 18년 전에 발간된 이 책 속에 이미 브라이언 트레이시, 밥 프록터, 빅터 프랭클, 나폴레온 힐, 맥스웰 몰츠 같은 성공학의 대가들과 그들의 사상이 녹아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때 나는 한동안 책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들의 이름과 저서가 이제야 내 눈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나 자신에게 약간의 놀라움과 의문을 던졌다. 책의 문장에만 밑줄을 긋고 그것이 주는 용기와 위안에만 집중했던 내가, 이제는 그 문장을 말한 사람들과 그들의 철학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18년 전, 아니 12년 전에도 나는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간절하지 않았고, 지금처럼 명확하지도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책 속의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그 문장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 뒤에 있는 사상과 배경을 알고자 한다. 이것은 단지 관심의 변화가 아니라, 나 자신이 성장했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징표가 아닐까.
문득, 18년 전과 12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만약 그 시절에도 지금처럼 간절하고 명확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각할수록 아쉬움과 후회가 마음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창밖에서는 강한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정신 차려!”라고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곧 깊은 후회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로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생각했다.
“그때의 나에게는 그때의 한계가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때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생겼기에 이 책이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18년 전에는 그 시절의 내가 필요로 했던 만큼 이 책이 내게 다가왔고, 12년 전에는 또 그만큼의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 넓은 시야와 더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 책이 다시 나를 부른 것이다. 책은 내 곁에서 변함없이 기다렸고, 내가 성장한 만큼 더 깊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었다.
나는 이 깨달음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후회의 감정은 사라졌고, 대신 새로운 다짐과 결심이 마음에 자리 잡았다.
“책은 그래서 두고두고 계속 읽어야 한다.”
이 간단한 진리를 오늘, 아주 명확하게 깨달았다. 책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성장할 때마다, 내가 변화할 때마다, 책도 그만큼 새로운 의미와 깊이를 가지고 내게 다가온다. 나는 책장을 다시 펼치며 한 문장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지금의 나는, 이 문장이 다음에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기대할 만큼 또 한 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을 보니 어느덧 오후 두 시를 넘기고 있었다. 책을 덮고 몸을 가볍게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간단한 웨이트를 하고 샤워를 마쳤다. 상쾌해진 기분에 문득 아내의 퇴근길이 떠올랐다.
오늘은 유난히 날씨가 차갑고 바람까지 거세게 불었다. 이런 날, 아내가 평소처럼 걸어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물론 아내는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지만, 퇴근 시간과 버스 시간이 잘 맞지 않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그녀는 그런 기다림을 번거로워해 걸어오는 것을 더 선호했지만, 오늘 같은 날씨는 그마저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아내가 괜찮다고 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보다는, 추위 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기온이 낮아지고 바람이 불수록 사람의 몸도 마음도 지치기 쉽다. 그리고 마중을 가는 이 작은 행위가 오늘 아내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두툼한 외투를 걸쳐 입었다. 집 밖으로 나서며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겨울의 냉기가 몸을 감싸는 순간, 나는 이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길을 걸어가는 동안, 따뜻한 차를 한 잔 준비해 두고 그녀가 도착했을 때 손에 건네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운 날씨 속에서, 이런 작은 배려들이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오늘 나는 그 배려를 통해 내 하루에도 잔잔한 따뜻함을 더하고 있었다.
카톡으로 아내에게 도착을 알리고, 근무지 앞에서 잠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한 얼굴로 걸어오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차에 올라타며 아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추워서 걱정했는데, 역시 신랑밖에 없네!"
아내의 말은 짧았지만 그 속에 담긴 고마움과 기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고, 나로서는 잠시 시간을 낸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도 좋아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아내의 웃음은 곧 나의 행복이 되었고, 그 순간 차 안의 공기마저 포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의 미안함도 스쳤다. 이렇게 작은 배려가 아내에게 큰 행복을 준다면, 왜 나는 그동안 더 자주 이 행복을 나누려 하지 않았을까? 아내가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자연스럽게 기뻐지고, 그 기쁨이 다시 아내에게 전해지는 이 선순환의 행복은 늘 곁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종종 그것을 간과하며 더 멀리, 더 큰 행복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잠시 짧은 생각에 잠긴 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런 작은 순간들을 놓치지 말자. 추위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마중을 더 나가자." 아내의 웃음이 나에게도 얼마나 큰 위안과 기쁨을 주는지 깨달은 지금, 이 다짐은 더이상 단순한 결심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행복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걸 오늘 다시 배웠다. 잠깐의 시간, 작은 배려,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미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임을, 차 안에서의 그 따뜻한 순간은 내게 가르쳐 주었다.
막내는 여행을 떠났고, 오랜만에 아내와 둘만의 저녁을 맞이했다. 오늘 저녁 메뉴는 잡채. 둘이 먹을 만큼만 준비한 잡채와 간단한 반찬들로 식탁을 채웠다. 아내는 연신 맛있다며 고맙다고 했다. 단출한 식사였지만, 그녀의 리액션은 마치 최고급 요리를 대접받는 사람 같았다.
순간, 마음속에 작은 생각이 스쳐갔다. “혹시 내가 퇴근길에 마중을 나간 덕분에 그녀의 기분이 이렇게까지 좋은 걸까?” 약간 쓴웃음이 나왔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내가 만든 잡채를 한입 맛보니,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은 음식도, 대화도, 함께 있는 시간도 모두가 적당히 따뜻해서 더 큰 만족감을 주는 날일지도 모른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차 한 잔을 나누며 하루를 정리했다. 아내는 회사에서 있었던 일과 소소한 이야기들을 꺼냈고, 나는 오늘 읽었던 책의 내용을 간략히 전했다. 차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김과 아내의 미소, 그리고 나누는 대화 속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꼈다.
아내는 볼링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나는 일기를 쓰며 오늘을 돌아본다.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추운 겨울밤, 우리 집은 작지만 온기가 넘쳤다.
오늘은 특별한 사건도, 화려한 계획도 없었지만, 따뜻하고 평온한 하루였다. 이 조용한 행복이야말로 하루의 끝을 따뜻하게 채우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삶의 행복은 이렇게 작은 순간들을 어떻게 느끼고 간직하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이 행복한 감정을 기억하며 오늘의 일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