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이 적힌 등불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은 사랑의 무게

by 마침내

기억 속 할머니의 손은 언제나 따뜻했다. 새벽 2시. 할머니는 깜깜한 새벽에 나를 깨웠다. 주름 가득한 손으로 내 머리를 빗기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인 뒤 옷을 입혔다. 전날 저녁,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몸짓으로 나를 깨끗이 씻겨주신 뒤 잠드셨다. 조용히 내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분홍색 보자기 보따리를 집어 들었다. 다림질이 잘 된 보자기 안에는 향과 양초, 쌀 한 봉지가 싸여있었다.


나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잡고 하얀 버선코를 따라나섰다. 가로등이 밝혀진 골목길을 벗어나 택시를 탔다. 할머니의 토닥거림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조용히 흔드는 손놀림에 눈을 뜨면 여전히 밖은 어두운 새벽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절에 도착했다.


절에 들어서면 할머니는 가장 먼저 법당으로 향했다. 정면의 부처님께 삼배로 인사를 올린 뒤, 한쪽 벽에 줄지어 있는 작은 호롱불들 앞으로 다가가셨다. 그중 하나의 등 앞에 멈춰 심지를 끄고 뚜껑을 열었다. 짧아진 심지를 쭈욱 길게 뽑아내고 기름을 채운 뒤, 다시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옆에 놓인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등불 앞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내 인등뿐 아니라 심지가 짧아진 다른 사람의 등도 세심히 살폈다. 할머니의 손끝을 따라 등불이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나는 그 모습을 따라다니는 일이 작은 재미였다. 그러다 흥미가 식으면 법당에 쌓인 방석에 올라타 썰매를 타듯 돌아다녔고 그것도 싫증이 나면 숨바꼭질하듯 불단(부처님이 계신 단상) 아래로 숨어들어 잠들곤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어느 절이나 법당 한쪽에는 등불 하나하나마다 이름이 적혀 있다. 그 등을 인등이라고 한다. 인등은 그 등 앞에 적힌 사람을 지켜주는 호신불이다. 내 가족이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내가 절에서 일하게 된 후, 이직을 할 때마다 제일 먼저 인등을 정리한다. 오래된 이름표는 새것으로 바꿔주고, 전구가 꺼진 등은 교체해 준다.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데 시간은 기름에서 전구로 변했다.


허리춤에서 꼭꼭 접어 둔 지폐를 꺼내며 “우리 손주 인등값이야.” 하고 건네는 노보살님을 가만히 바라본다. 돌아서는 뒷모습에 어린 시절 나를 지켜주던 할머니의 모습이 포개졌다. 어린 나는 할머니를 따라다녔을 뿐 그 손끝에 담긴 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새벽에 나를 깨워 절까지 데려가신 그 걸음걸음마다 어린 손녀를 향한 사랑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내 이름이 적힌 그 작은 등불 앞에서 얼마나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을지 이제야 알겠다. 정화수 떠놓고 간절히 빌던 옛 어른들처럼 ‘우리 손녀 편안하게 해 주세요.’라는 그 마음이 얼마나 깊고 간절했는지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사람들의 바람은 결국 하나, 사랑하는 이의 편안함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어른이 되어서야 깨닫는 부모님의 사랑이 있지 않을까? 새벽부터 보자기 보따리를 들고 나섰던 할머니의 발걸음을 기억하며 나는 그 마음을 다시 생각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오후, 처마 끝 풍경소리에 실려 오는 바람을 따라 느린 걸음으로 법당을 향했다.


다른 이들의 등불도 신경 써주시던 할머니의 마음으로 법당을 둘러보고 인등을 확인한다. 누군가의 등을 살피던 그 마음으로, 하나하나 등불을 바라보며 그 길을 다녀간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린다. 우리 모두의 마음 한편에는 누군가를 위해 켜두고 싶은 작은 등불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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