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쯤으로 가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지금이 제일 좋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운 시절이 있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았던 시기다. 유튜브나 숏폼이 아니라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라디오를 들으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팝과 가요, 클래식, 세계음악을 듣던 그 시간 중 어디쯤에는 누군가의 집에 모여 방송국에 보낼 엽서를 함께 만들기도 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 제목으로 소설 같은 사연을 관제엽서에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 엽서 여러 장을 줄줄이 엮어 빨간 단풍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한겨울의 마을 풍경을 벽화처럼 그려 넣는 작업도 엽서를 꾸미는 일에 빠질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을 투자하고 열정을 쏟았던 목적은 기사를 빠르게 집중시키기 위해 멋진 헤드라인을 붙이듯 방송작가나 DJ의 눈에 잘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밤마다 오늘은 어떻게 엽서를 꾸밀까 숨어있던 창의성을 끄집어내기 바빴던 때다.
요즘은 방송에서 사연을 받을 때 엽서 대신 문자나 앱으로 받는다. 꼼지락거리며 그림을 그리고 색종이를 붙이는 대신 일정금액을 지불하고 사진을 보내거나 방송앱을 이용하여 실시간 댓글과 신청곡을 남기며 소통한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맞게 사연을 받는 방식이 달라졌으니 청취자가 방송에 참여하는 방법도 달라진 것이다. 엽서를 우체통에 넣고 며칠을 기다리며 내 이름이 불려지기를 기다리던 시간과 정성을 들이던 설렘 같은 것은 사라졌다.
기다리는 시간에는 수많은 감정이 생겨난다. 정성을 들인다는 것은 그만큼 애정이 생기는 것이다. 핸드폰으로 찍고 바로 보내면 되는 일이 시간을 단축시키거나 편리함에서 앞설 수는 있지만 그 찰나에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채팅창에 글을 올리는 순간 차를 타고 지나며 보는 풍경처럼 수많은 다른 글들에 묻혀 이전글들은 사라져 버린다. 길지도 않은 짧은 글들이 숏폼처럼 지나간다.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사이에서 살고 있다. 다중이 같다고 할까. 내가 만드는 '나의 시대'. 아주 느리게 천천히 사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핸드폰이 나오면 그 기능에 고양이처럼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들여다본다. 느리다고 뒤처지는 것도 아니고 세상 돌아가는 속도에 맞춰 따라간다고 잘 사는 것도 아니다. 어느 세대에 속하지 말고 어느 시대에 살려고 하지 말고 내가 만드는 나의 시대. 속도와 관계없이 나는 나를 잘 돌보며 나는 나의 시대를 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