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종 스스로 알고 있는 ‘나’보다 타인이 보는 ‘나’가 진짜라고 말한다. 스스로 알고 있는 자신은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타인은 ‘나’를 알지 못할 수 있다. 오랜 시간 곁에 있는 인연이어도 나는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적으로 또는 우리에게 B선생님의 성격은 평균보다 조금 더 고집이 세고 까칠하게 알려져 있다. 워낙 어른이기도 하지만 외모, 말투에서 풍기는 깐깐한 이미지와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 단어 하나까지 특유의 예민함으로 지적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분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된 사건이 있었다. 그 일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사건이었다.
대학 게스트하우스에서 집필 중이시던 선생님이 서울에 오셨다. 일을 마치고 떠나셔야 하는 날 갑자기 다른 일정이 생겨 하루를 더 머무르시게 되었다. ‘내려가야 되는데.’ 소리만 반복하시던 분은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신 후,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하셨다.
“114죠? 00 대학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학교 전화번호를 확인하신 후 다시 전화 버튼을 누르셨다.
“게스트 하우스의 B입니다. 내가 오늘 일이 생겨 가질 못해요. 내 방 미화원 아주머니한테 메모 좀 부탁할게요. 내일이 내 창문에 있는 화분에 물 주는 날인데요, 잊지 말고 화분에 물 좀 주시라고 메모 부탁드립니다.”
이야기 중이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선은 모두 선생님에게로 향했다.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모습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셨다는 뜻이다.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메모를 남기는 모습에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소한 모습에 한 마디씩 건네는 사람들을 보며 이야기의 화제의 다른 곳으로 돌리셨다. 다른 때 같으면 버럭 하실 수 있는 상황인데 화제를 돌리시다니 그 모습조차도 참 생소했다.
나는 그날 내가 알고 있던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화분에 물 주는 일 하루쯤은 건너뛰기도 하고 잊을 수 있는 분이었다. 그러기 이전에 창가에 화분을 두실 분이 아니었다. 나는 타인을 잘 모르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어느 한순간을 기점으로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박제해 놓고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한 장면의 모습이 타인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보면서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을 다시 되짚어 본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는 천차만별이다. 각각 바라보는 내가 달라 열 사람이 보는 나는 열 개의 나다. 누군가를 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내 기준의 판단은 아니었을까. 스스로 알고 있는 ‘나’보다 타인이 보는 ‘나’가 진짜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상대의 모습이 전부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를 유지가 어려운 것은 이런 부분을 놓치고 단정 짓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 타인을 알아가는 일은 세심한 관심과 배려가 반복되며 이어지는 시간이다. 단정 짓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