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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cropsia Jul 19. 2024

불안과 솥뚜껑

2. 시신경

 신체 기능 중에 중요하지 않은 기능이 없겠지만 보는 것만큼 중요한 기능이 있을까? 야생 동물이 시각을 잃으면 아마도 생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뛰어난 후각과 청각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주변 환경을 시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면 여러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 보여도 잘 살아가는 동물도 있다고 한다. 바로 카우아이 동굴 늑대거미이다. 하와이 카우아이 섬의 동굴에서 서식하는 이 거미는 다른 늑대거미와는 다르게 눈이 없다. 빛이 도달하지 않는 어두운 동굴에 적응하여 눈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촉각과 진동 감지 능력이 발달하여 어두운 동굴에서 먹이를 찾고 포식자를 피한다고 한다(어두운 동굴은 포식자에게도 불리한 환경이다). 하지만 이렇게 환경에 적응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불행히도 인간은 시각을 대체할 정도로 후각, 청각, 촉각, 진동감각 등이 뛰어나지 않다.


 2021년 기준 한국에 등록된 시각장애인은 251,620명(남자 149,321명, 여자 102,299명)으로 전체 장애인 2,644,700명 중 9.5%에 해당한다고 한다. 25만 명 정도면 경상남도 거제시의 인구와 비슷한 숫자다. 한국 전체 인구 5163만 명(2022년 기준) 당 25만 명이면 약 0.48%로 우리 주변에 1000명 중 4~5명은 시각장애인이 있을 수 있다는 셈이다. 시각장애의 원인은 선천적 원인과 후천적 원인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후천적으로 발생한 경우가 90.3%로 대부분이라고 한다. 나도 지금은 잘 보고 있지만 0.47%(0.48%의 90.3%) 정도의 확률로 후천적인 이유 때문에 시각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12개의 뇌신경 중 시신경(optic nerve)만큼 대뇌의 여러 부위와 연결되어 있는 뇌신경은 없을 거 같다. 그만큼 시각 정보는 뇌의 다른 기능에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테슬라의 자율주행을 한번 생각해 보자. 최근 출시하는 모델 3, 모델 Y는 초음파 센서는 제거하고 카메라로 얻은 화상 정보만으로 주차보조와 자율주행을 시도하고 있다. 시각 정보가 차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유일하면서 가장 중요한 정보가 된 것이고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시각 정보를 정확히 분석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셈이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눈앞에서 위험을 맞닥뜨리게 되면 반사적으로 회피하게 된다. 반사적으로 반응하기 위해선 정보가 여러 곳을 거쳐서는 불가능하다. 시각 정보가 과거 학습된 위험이라면 바로 편도체가 활성화되면서 ‘도망쳐(run away)’ 모드가 발동해야만 한다. 필자는 군의관 시절 한 국군병원에서 근무했는데 병원 뒤편 군관사에서 살았었다. 그 국군병원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군부대 안에는 고라니가 출몰하기도 하고 꿩이 날아와 관사 베란다 창문에 부딪혀 죽는 일도 생기곤 했다. 하루는 출근하기 위해 관사에서 나와 군 병원 쪽으로 걸어가는데 발아래 무언가 기다란 물체가 기어가는 것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뱀이었다. 나는 그 순간 ‘이 기다란 물체는 생긴 것을 미루어 판단하건대 뱀일 확률이 높으니까 뒤로 몇 걸음 물러서야지’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냥 순간적으로 무의식적 판단하에 움직인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적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뒤편에는 '망막 -> 시신경 -> 시각피질(후두엽) -> 편도체 -> 회피'라는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뒷걸음질 쳤는데도 불구하고 뱀에게 발목을 물렸다면...... 그 후로 나는 바닥에 무언가 기다란 물체를 보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마음 본부를 불안이 차지해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속담대로 되는 것이다. 이 속담에는 과민해진 '편도체'의 역할이 숨어 있다. 솥뚜껑은 변화한 것이 없는데 솥뚜껑이라는 시각 정보가 전달된 시각 피질과 편도체 사이의 연결이 변화한 탓에 행동이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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