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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외주화

죽음을 둘러싼 풍경의 변화

by macropsia

나의 할아버지는 위암 수술을 한번 받으셨는데 몇 년 뒤에 위암이 재발하여 재수술 후 투병 중에 돌아가셨다. 재발 후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병원에 계시다가 우리 집으로 오셨다. 오래전 일이라 어느 정도 우리 집에 계셨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꽤 계셨던 것 같다. 드시는 게 별로 없어서 한 번씩 간호사가 집에 방문해서 영양제를 정맥주사하고 가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방문 간호 서비스일 텐데 당시에는 그런 공공 의료 사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요는 있으니 제도권 밖에서 사사로 이루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돌아가셨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직전 겨울 막바지이었다. 내가 온전히 겪은 첫 죽음이었다.


장례는 집에서 치렀다. 당시 우리 집은 12층 높이 아파트의 6층이었다. 조문객을 맞이하기 위해서 현관문은 활짝 열어 두었다. 당시 범어사 앞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친척분이 오셔서 조문객에게 대접할 음식을 준비해 주셨다. 물론 장례 기간 동안 식당을 닫고서였다. 주방 가스레인지 위에는 커다란 솥이 올려졌고 장례 기간 내내 육개장이 끓고 있었다. 식구들이 잠시 쉬는 방 하나를 제외하고는 거실이며 방이며 모두 조문객을 맞이하기 위해 사용했다. 며칠 동안 하루 종일 찾아오는 조문객들 때문에 시끄러웠을 텐데 앞집이며 주변 이웃으로부터 민원은 전혀 없었다. 당연히 할아버지 시신의 염도 안방에서 이뤄졌다. 가족들이 모두 안방에서 염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당시 어떤 느낌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너무 낯선 장면에 그냥 생각과 몸이 얼어있었던 것 같다.


출상하는 날, 할아버지의 관이 집을 나섰다. 나는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고 관 앞에 섰고 아버지의 지인분들이 관을 들고 6층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관을 엘리베이터에 실을 수 없으니 계단은 당연한 경로였지만 아마도 무거운 관을 든 분들은 관을 떨어뜨릴 까봐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분들의 노심초사는 끝이 아니었다. 장지에 도착해 보니 장지까지의 오르막길이 경사가 매우 급하고 거리도 멀었다. 게다가 막바지 겨울 추위가 매서운 날이었다. 영정 사진을 든 손가락 끝과 가파른 오르막길을 딛는 발가락 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관을 든 분들의 손가락과 발가락 끝의 고통은 내가 느낀 고통보다 훨씬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미리 파놓은 장지에 관을 내리고 나서야 그분들의 고통이 끝이 났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약 3년 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의예과 1학년 2학기 무렵이었다. 내가 겪은 두 번째 죽음이었다. 할머니는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응급 수술을 받았지만 긴 투병 생활 없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셨다. 할아버지의 죽음과 크게 달라진 것은 죽음의 과정이 일상 공간이 아니라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이뤄졌다는 점, 그래서 죽음과 나 사이의 거리가 다소 멀게 느껴졌다는 점, 그리고 장례도 병원 장례식장에서 이뤄졌다는 점이었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조문객을 위한 음식 준비는 이번에도 식당 하시던 친척분이 맡아주셨다는 것과 장지가 할아버지 묘 옆이어서 이번에도 운구가 힘들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죽음의 과정 중 일부는 병원과 장례식장으로 외주화 된 셈이었다.


그로부터 6년 후 나는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이 되었다. 인턴이 된 후 타인의 죽음들을 겪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겠다고 하는 가족들의 요구로 임종 직전 환자를 집으로 모시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기도삽관되어 있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인턴들이 앰부백(Ambu bag)을 잡고 환자와 같이 앰뷸런스에 타고 갔다가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 집에 도착해서 앰부백을 뗐을 때 바로 돌아가시면 사망선언하고 기도삽관된 튜브까지 제거하고 병원으로 돌아오는 것 까지가 인턴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런 풍경은 점점 사라져 이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인턴이 되고 23년이 흘렀다. 이제는 많은 죽음이 의료기관에서 이뤄진다. 요양병원 아니면 종합병원에서. 의사의 사망선언 후 시신은 장례식장으로 옮겨진다. 그 순간부터 장례지도사가 개입하여 장례의 시작부터 끝까지 관여한다. 죽음의 완벽한 외주화이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장례를 치르기에는 우리 삶의 형태가 너무 변해있다. 고층 아파트가 주거 형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대이다. 저층이면 그래도 시신을 옮길만하겠지만 고층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금만 시끄러워도 층간 소음이다, 벽간 소음이다, 민원이 들끊는 현실인데 집에서 장례를 치르고 조문객을 받는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1 가구 다 차량 시대에 거주민들의 주차 공간도 부족해서 난리인데 조문객들의 주차를 소화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누군들 내가 오랫동안 살아온 곳에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죽음 이후의 일은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차마 '나는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라는 이야기를 못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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