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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열 Sep 26. 2022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은 왜 이상한 사랑을 할까

나는 사랑을 배웠다. 연습은 모르겠고. 스스로를 사랑해보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무미건조하게 초등학교 종례시간에 세 번 되풀이했던 문구를 되풀이했다.


나는 내가 좋다. 나는 내가 좋다. 나는 내가 좋다.


이러면 저절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건 줄 알고. 그럴 때마다 상대방은 이마를 짚었다.


자존감과 자신감을 동일하게 봤던 때가 있었다. 강한 척을 하면 자신감이 올라갔고 두 팔로 어깨를 끌어안으면 별다른 깨달음 없이 난 뭔가 창의적인 것 같다는 착각에 들게 했다.


자아 존중감. 자아를 존중하라고.

혼자서 그게 되긴 되나?

자화자찬이랑 똑같은 거 아닌가?

아니면 더 나아가서 그것은 자아분열의 정신과적 질병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자 확신이 들려고 했다.


혼란형 애착에 관해서 고등학생 때 배운 적이 있었다. 회피형과 안정형, 불안형. 그리고 마지막 혼란형.

그러나 부모를 외면해서 그 어디에도 분류가 되지 못했던 유형. 애초부터 이 개념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듯. 뒤늦게 추가된 개념.

양육자가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는데, 회피와 위협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개념.


되돌아보면

으레 대부분의 어른들이 자신의 아이가 아니면 시간을 잘 써주지 않듯, 어른들은 어른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니 나는 자연스레 독립적이며, 나이대에 답지 않게 어른스럽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나마 많이 들었던 질문을 기억한다.

“무슨 생각 해??”
“네 표정은 매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초등학생 때 시행한 설문지에 죽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 “고 대답했다가 부모님께 연락이 갔던 적이 있었다.

어른의 세계에선 어린 사람이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 자살과 더불어 꽤나 심각한 문제로 여기는 것 같았다.

모친은 학교에 가서 내가 어떤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입시켰다.


내가 하는 말들은 어른들에겐 늘 변명이 되었어서, 운을 띄우다 스스로 입을 꿰매길 서너 번 반복했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고 한 거였는데. 


엊그제 어떤 동영상에서 봤다. 대개 타인을 믿지 못하면서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혼란형 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가정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런데 그 말을 듣던 옆 인터뷰어가 고민 없이 바로 이런 말을 한다.

“그러면 혼란형 애착의 사람들은 인간관계도 쉽지 않으시겠어요.”

“네, 맞습니다.”

불안정 애착과 자존감이 어느 정도 연결되어있다고 생각은 하나, 이것이 왜 대인관계의 어려움까지 넘어가게 되는 걸까. 너무도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엮여가는 두 관계를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자신을 좀 사랑해주라는 말이 자존감을 높이라는 말과 같은 언어인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오히려 다른 대상을 더 사랑하려고 하지 않나? 이 체계를 나는 잘못 배워온 것인가? 이외의 여러 복합적인 질문들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드라마에서도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너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아무도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대사도 있던데.


배가 고프면 밥을 더 맛있게 먹는다는 인과관계가 있듯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왜 인간관계도 서투른지 알고 싶었다.

'너도 결국 나 버릴 거지’라는 생각에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타인에게도 날이 서기 때문인 걸까.


그러다 타인들의 도움으로 답을 찾은 것 같았다. 많은 의견이 있었고, 그들의 추측은 모두 그럴싸했다. 심리학을 기반으로 가능성을 여는 의견도 있었다. 내게 인상 깊었던 세 가지 대답이 있었다. 그들은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 비유와 한 가지의 인과관계를 설명해주었는데,


첫 번째는 배터리 충전기 없이 활동하는 핸드폰과 같아서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두 번째 비유는 사랑 듬뿍 받고 자란 강아지가 밖에서도 사랑을 받고 학대를 받고 자란 강아지는 밖에서도 험하게 맡겨진다는 비유였다.

마지막 세 번째는 사람은 사랑을 받지 못하면 여러 과정을 거쳐 자책을 시작으로 상대를 착취의 대상으로 인식하여 순종하기 시작한다는 원리였다.

이쯤 되니 학과 교수가 면담 때 내게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스스로를 사회성이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언니, 오빠와는 잘 지낼 수 있던 건, 그들은 동년배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나를 챙겨줬기 때문일 수 있다고.


나는 동등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관계의 올바른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학생 때 선생님들은 내가 어른과 동등하게 생각한다고 싫어했고, 그럴 때마다 늘 내가 어떻게 해야 미움받지 않을 수 있는지 걱정했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내가 어쩌면 상대에게서 “지배와 착취자”가 되려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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