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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열 Mar 10. 2023

죽어버린 남자친구

남자친구랑은 여러 번 헤어졌었지만 그만큼 오랜 기간 헤어진채 지내본 적은 없다.

헤어진 기간 동안은 사람처럼 생활하지 못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아무도 못 막는다고 했나.

그게 정확히는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아마도 미련이 강하게 남아서 미치기 일보 직전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떤 유튜버였나, 그 동영상에 남은 댓글이었나.

어떤 문구가 생각났다.

거울을 들고 남자친구의 집 앞에 찾아가서 잡았는데 자신이 처량해지는 그 모습을 보고도 잡고 싶으면 그건 연애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아. 그거 난데. 씨발.



알고는 있다. 괜히 남의 집 귀한 아들 망치는 길이란 걸 알아서.

어디서 귀하지 않은 남의 집 자존감 낮고 서툴음이 다분한 여자가 굴러들어 올 순 없으니.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해서 같이 산 커플링을 못 뺀 것도 있지만 커플링을 빼기엔 반지가 너무 예쁜 탓도 있었다. 아무도 못 믿겠지만.


그러나 하루를 넘어 이틀째에서 사흘째로 넘어가는 밤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가 되자,

이제는

그만 그 사람을 놓으라는 듯

반지 사이즈가 내 손가락보다 커져서

뼈에 걸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창그랑’하는 소리.

이제 이 반지는 나와 그의 것이 아니라는 듯

적당히 좀 하고 이제 놓으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실연당한 사람에게

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하루 중 저녁 식사에 겨우 마주한 부모님이

어쩌다 싸우게 되어 떨어뜨리는 쇳덩어리 젓가락이

떨어지는 소리와 매우 비슷하다.


영원할 줄 알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반지로 커플링 한 건데.


‘저기, 지금 바빠? 나 헤어졌는데 너무 힘들어. 곧 잊힐 거란 건 알고 있는데, 그 사이에 내가 죽어버렸을 것 같아. 근데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아. 근데 자고 일어나면 얘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친구들이나 그녀들의 어머니나

공통적으로 했던 말.

“니가 드디어 사랑을 알았구나.

널린 게 남자다.

너 정도면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지. 그간 왜 그런 시간낭빌 하고 있었어.”라고.

근데 그 말들, 너무, 진부해.

하지만 세대를 거쳐 여기까지 온 거 보면

진부한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머리론 알고 있지.

달포만 기다려보자 하지만 내가 그 사이에 죽으면 어떡해. 라며 계속 내가 관에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팔이 내 팔 같지가 않아. 다리에 감각이 없어. 잘라버릴 거야.

지금 와서야 칼을 들고 설치던 나를 겁 없이 말려준 친구들이 참 대단하고 고맙다고 느낀다.

엄마는 남자에게 매달리는 것보다 한심한 짓은 없다고 늘 말해와서 내 친구가 이런 짓을 하면 말이 없어질 것 같은데.

너희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익숙하다는 듯 행동했다.

자기들도 이런 상황을 많이 거쳐와 봐서 안다는 듯.

때론 가족보다 타인이 더 힘이 되기도 한다.


나는 습관처럼 남자친구에게 말해왔다.

내가

너 보다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든 이별의 건덕지를 없애보려

데이트를 하는 도중에도

너 나랑 헤어질 거면

난 네 팔을 잘라갈 거야.라고 진심이 다분하게 들리도록 말한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너는 이걸 농담처럼 들은 것 같던데.

이별하는 순간에도 나는 팔 타령을 했다.

너는 날 미친 사람처럼 봤겠지만. 진심이었다.

친구들과 만났을 때도 너 얘기 나오면 ‘아 내 팔... 주기로 했으면서’라고 얼굴을 붉혔는데.

그녀들은 내가 너의 남자 친구였다면 소름 끼칠 것 같다고 한다.


알아 나도. 왜 모르겠어.


너를 잊을 때쯤 나는 생활에 돌아갈 수 있었다.

정확히 사흘째였다.

잊을 수 있었던 건, 네게서 배울 점이 전혀 없어 보여서.

다혈질이어서. 헤어지고 나서 이성을 되찾으니 네 본심은 연인이 아닌 사람들에겐 너무 못난 사람이어서.



헤어지는 이유를 누군가 물어봤을 때 맹세코 내가 잘못해서 헤어진 게 아닌데 왜 니가 더 갑처럼 행동하는 질 모르겠고 괘씸해서.


헤어지고 나서 붙잡을 동안 그가 나에게 돌려준 말들은 모두 정말이지 전의를 꺾는 말들이었다.

너만 잘하면 돼. 나는 문제가 없어. 네 주위에 왜 사람이 없는 건지 알아?


그가 했던 이별의 방법은

니가 할 수 있는 선택 중 가장 비겁한 방법이었다.


누군가와 말싸움의 갈등이 빚어졌을 때

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봐왔다.

논점을 정확히 짚어서 나의 허를 찌르는 말을 하는 사람과

의미 없는 비난과 논쟁을 하는 사람.


전자의 사람일수록 더 배울 점이 많아서 가까이 있고 싶었고

후자의 사람일수록 내가 왜 반박을 하고 변명을 해야 하나 싶게 만들었지만


남자친구는 후자의 사람이었는데도

모든 연애에서 그래왔듯 ‘예외’를 부여했다.

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래, 넌 앞으로도 영원히 나랑 볼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 모든 사랑의 약속과 관계의 일말의 가능성, 내가 들어둔 모든 보험들이 모두 무너지면서 난 겨우 잊을 수 있었다.


누군가는 더 잘 해주지 못한 것에 후회를 느낀다지만

나는 여기서 더 잘해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더 잘 잊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넌 죽은 사람이어서 우린 더 이상 만날 수 없고 처음처럼 돌아가지 못하는 사이라고.

우린 애초에 만날 건덕지도, 접점도 없었는데.

그래, 넌 뒤져버린 거다. 아니, 우린 애초에 만난 적이 없는 모르는 사이다. 네 말대로 우린 서로 없을 때도 잘 살아온 것처럼. 넌 이번의 사고로 죽은 거다. 난 살아남을 거야. 사인이 실연이면 얼마나 창피하냐. 가뜩이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난데. 죽더라도 과로사가 훨 멋있다.




방정리를 하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널 왜 좋아했지.

별로 좋은 사람도 아니었는데.

물론 나도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끼리끼리 만난 거였겠지.

하며.

그렇게 잊을 때쯤 연락이 왔다.

그 내용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 연락 꼬라지 한 번 참 너답다.


너는 늘 내 변수.


날 망치러 온 빌어먹을 내 구원자.

아직 살아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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