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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게트는 필수 아이템이다

길고 바삭한 안정감, 프랑스인의 하루를 지탱하는 기둥

by 마담 히유

프랑스에 살다 보면 바게트는 음식이 아니라 생존 도구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처음엔 그냥 "유명한 프랑스빵" 정도로 생각했다. 바로 샀을 때는 겉은 바삭, 속은 쫄깃하지만, 하루 지나면 딱딱해져서 사람도 공격(?)할 수 있다는 바로 그 빵.

하지만 며칠만 살아보면 알게 된다. 바게트는 그냥 빵이 아니다.

바게트는 프랑스인의 하루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프랑스인은 바게트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없다.

아침엔 바게트에 잼과 버터 발라서 든든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점심엔 바게트를 반으로 잘라 햄과 치즈 야채 등등을 넣어 샌드위치로 변신하기도 하며,
저녁엔 치즈나 와인 옆에 조용히 자리 잡고, 접시에 남은 소스를 싹싹 긁어서 먹는 데 사용한다.

수프에도 바게트를 푹 찍어 먹기도 하는데, 밥 없는 나라의 "국밥 소울푸드" 같은 존재랄까.

이 뿐만이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이가 갓 난 아기한테 바게트를 이유식 겸 주기도 한다.

이쯤되면 개인적으로는 파리바게트가 아니라 프랑스 바게트가 맞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에서 장 보고 집에 갈 때, 바게트를 안 들고 집에 가면... 뭔가 허전하다.

필요한 건 분명히 다 샀는데 손에 바게트가 없으면 괜히 뭔가 빠진 느낌에 왠지 오늘 장보기 실패한 기분이 든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매년, 빵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나 의미 있는 대회가 열린다.

Concours de la meilleure baguette de Paris, "파리 최고의 바게트를 뽑는 대회"로 파리 전역의 내로라하는 장인급 빵집들이 참여하는데, 경쟁은 그야말로 치열하다 못해 불꽃이 튄다.

크라상, 뺑오쇼콜라 등 각 카테고리별로 존재하지만, 사실 바게트만큼의 주목도는 덜한 편이다.


이 대회의 심사위원들은 바게트의 맛과 향, 식감, 굽기, 심지어 소리까지 평가하며 그해 "최고의 바게트"라는 영광의 자리를 정한다.


이 대회에서 1등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고? 단순히 트로피 하나 받고 끝나는 게 아니다.

무려 1년 동안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인 엘리제궁에 바게트를 납품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대통령이 먹는 빵, 엘리제궁에 납품되는 바게트. 그것만으로도 이미 광고 문구 완성이 되지 않는가.

이 타이틀 하나만으로 그 동네 작은 동네빵집은 단숨에 "성지"가 된다.



내가 처음에 파리에서 살던 집 바로 코앞에 바로 이 1등 바게트가 있었다. 그냥 매일 들러 습관처럼 바게트를 사던 집. 파리 살면서 다닌 첫 빵집이었기에 내 기준은 그 빵집의 바게트가 되어서, 다른 곳에서 바게트를 먹으면 "이 맛이 아니야..." 하면서 고개가 절레절레 자동으로 저어지곤 했다. 오죽하면 이사를 간 이후에도 계속 그 빵집에 갔을까?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로 이사를 갔다.)


그곳은 2017년에 이 대회에서 1등을 했다. 그 뒤로 사람 줄이 길어지기 시작했고, 가게 앞에 붙은 금빛 로고와 언론 기사들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어느 날 갑자기 그 빵집은 문을 닫았고 주인이 바뀌었다.


수소문을 해보니, 더 넓고 더 고급스러운 자리에 새로 오픈했다고 했다.

당연히 좋은 소식이지만, 아쉬움은 결국 내 몫이었다.

지금도 그 거리 한복판을 지날 때면 왠지 코끝에 남아있는 고소한 빵 냄새와 함께
"아... 그 바게트 진짜 맛있었는데..." 하는 마음 한 자락이 불쑥 솟아난다.


바게트 대회 심사관. 냄새와 질감도 확인한다



이전 글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파리에서 바게트를 판 적이 있다.

저녁 8시에 매장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하루의 피로가 가득 묻은 얼굴로 헐레벌떡 들어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는 외쳤다

" Une baguette s'il-vous-plaît (바게트 하나 주세요)"



아마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나눌 저녁 식사를 위한 바게트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로 원했던 건 단순한 바게트 한 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바게트는 오늘 길고 긴 하루를 버티고 살아낸 자신에게 주는 조용한 보상,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 나눌 따뜻한 저녁 시간을 지탱해 주는 작은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운 좋게 마지막 남은 바게트를 받아 든 사람들은 짧은 미소와 함께 안도의 숨을 내쉬고 행복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왠지 모르게 뿌듯하고, 나까지 괜히 기분이 좋아지던 순간들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날따라 물량 조절(?)에 실패해서 진열대가 텅 비어 있을 때 보이는 그들의 허탈한 표정.
그들은 괜히 다른 남은 빵들을 한번 훑어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마지못해 다른 빵 하나를 고른다.

그 표정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는 듯했다.

"그래… 뭐, 하는 수 없지..."



프랑스에서 바게트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더 가볍게 해주는 무게고, 어떤 사람에겐 저녁 식사 테이블을 완성시켜 주는 마지막 조각이다.


나 또한 퇴근 후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픽업하고 같이 바게트를 하나 사들고 집에 가곤 한다.

저녁 식사용으로 산 바게트를, 집으로 돌아 가는 길에 아이랑 오물오물 반쯤은 다 먹어버리고 초라한 반쪽짜리 바게트만 집에 들고가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어찌 됐건 바게트를 집에 사서 들고 가면 오늘 하루도 어떻게든 “프랑스 답게” 살아낸 기분이 든다.


나는 한국인이라 저녁에 밥을 챙겨 먹을 때도 많지만, 그래도 바게트를 살 때가 많다.

그냥, 그래야 뭔가 하루가 완성되는 느낌.


우리에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데 꼭 필요한 건 특별한 만찬도, 값비싼 와인도 아니다.

그냥, 바게트 하나. 그것이면 충분한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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