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할 텐데
올해 초, 학교가 끝나고 잠시 한국에 다녀왔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에서 지낸 지 9개월 만의 방문이었다.
2016년 6월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로 넘어올 때가 생각났다. 상대방이 뭐라고 말하는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는 너무나 편안한 마음이었다. 내가 하고싶은 말을 내 마음껏 표현할 수 있고, 혹시나 말실수를 하더라도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우는 거니까 이 정도 실수는 괜찮지 않니? 그래서 정확한 단어는 뭐라고?" 되물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셈이다.
2016년 한국에 살던 나는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었었다. 국내 항공사 말고 외항사 쪽으로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는데...(역시 사람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 아는 분의 소개로 지금의 내 옆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 뒤로는 워홀 비자로 방향을 돌렸다. 그래서 여기 프랑스에 왔다. 파리도 아니고 샬롱쉬르손이라는 작은 마을에. 그를 따라온 것이다.
막상 여기에 와보니 매일의 일상은 있었지만 내가 할 만한 일은 찾기가 힘들었다.
자기 계발서나 꿈을 찾은 이들의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장이 있다.
"자신을 마주하세요. 내가 누구인지 내가 뭘 원하는지 말이에요."
그런데 진실된 나를 마주하는 것은 힘들고 싫다. 내가 꿈꾸던, 되고 싶던 '내'가 아닌 온전한 '나'는 정말 가여운 아이 었다. 작은 바람에도 파르르 떨며 불안해하고, 혼자 모든 것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에 괜스레 덩치를 부풀리는 별거 아닌 존재.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크게 못나지도 않은 아이.
얼마 전에 동네에 있는 패스트푸드 가게 면접을 보았다.
"우리 매장에서 일한다고 했을 때, 본인이 생각한 '미션 MISSION'은 뭔가요?"
미션이라... 생각지도 않은 질문이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면서 특별한 미션을 가져야 하는 건가? 어떤 미션을 내가 꿈꿔야 하는 건가? 내가 무슨 말을 해야 저 사람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려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시간은 흘렀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떨리고 불안한 와중에 나는 또 상대방의 기준에서 나를 포장하고 있었음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어쩌면 '면접'이라는 특성상,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고도 본다.)
이십여 분간의 면접 후 집으로 돌아와서는 한참을 울었다. 무기력함과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 안에서 휘몰아쳤다.
'내가 여기서 이런 일 하려고 그동안 공부하고 있었나? 하긴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건 그건 프랑스에서의 경력이 아닌 게 당연한 거겠지. 저들은 한국이 어디인지, 어떤 삶이 있는 곳인지를 모르니까. 그리고 나는 외국인으로 이 나라에 있는 거니까 이 정도 수준의 삶이 당연한 거 아닌가?'
근데 이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이 슬퍼졌다. 이게 당연한 거구나.
그러나 반대로, 이렇게 면접이라도 볼 수 있고 이렇게 일을 하는 것도 행운 아닐까? 이조차도 감사한 일 아닐까?
다음날 아침 면접관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제 면접 본 ***이라고 합니다. 기억하시죠? 제가 어제 너무 떨려서 제대로 말을 못 하였어요. 또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궁금한 것들도 있고 해서... 혹시 2차로 면접을 볼 수 있을까요?"
-네, 못할 것도 없죠. 제가 주말 지나고 나서 다음 주 초에 전화 줄게요. 그때 다시 약속 잡읍시다.
이들의 근무조건 :
-주말 토, 일에 일할 수 있어야 할 것.
-야간팀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하나 야간수당 없다.(패스트푸드점의 야간수당은 새벽 1시가 기준인데, 본 매장은 새벽 1시에는 모두가 퇴근.)
-주당 24시간 근무.(일반적으로는 주당 35시간인데, 해당 점포는 전 직원 주당 24시간으로 일하고 있다고 함.)
-2개월간 시범적으로 일해보고 그 뒤에 근무 연장을 생각해봤으면 한다. (내 비자가 6월 초 만료라 무조건 한국으로 귀국해야 한다. 2개월 기간제는 서로에게 괜찮은 조건)
내 입장에서 제일 실망(?)스러웠던 건, 정해진 시간표가 없다는 것.
밤에 일을 해야 하는 것과 주말에 일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럼 시간표가 정해져 있어서 그 루틴으로 움직이는 거냐니까 매일 바뀌니까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토, 일 일하더라도 주중에 이틀 쉬고 그 시간표가 정해져 있기를 바랐는데... 정보도 제대로 안 줘놓고 어떻게 생각하냐니.
지금은 2차 면접 전화를 기다리는 중이다. 할 말을 좀 정리했으니 서로의 입장에서 일부 조정만 된다면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6월까지 약 3개월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일하는 게 나으니까 말이다.
아니면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는 공정무역 가게에서 자원봉사로 일해볼까도 생각 중이다. 이 가게는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곳인데, 여기서 일하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관계를 맺는 것이 오히려 일하는 것보다 여러모로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이 든다.
*여전히 나만 정체돼있고, 나 빼고 모두가 힘차게 움직이는 거 같다. 나는 가만히 있고 사람들은 제 갈 길로 나아가는 것 같고. 나만 갯벌에서 발버둥 치는 거 같다. 뭐가 맞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은데, 한국에 있을 때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 말인 즉, 한국이건 프랑스건 나 자신이 아직도 준비가 덜 됐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