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듣는 한편의 봄날 드라마, 김동률의 '그럴 수밖에'
#. 그
오늘은 드물게 늦잠을 잤다.
새벽까지 괜히 잠이 오질 않아 책도 뒤적뒤적, 영화 목록도 여러 번 둘러봤지만 맘에 들지 않아 시간만 흘려보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작업을 했으면...'
아직 마감은 넉넉하지만, 성격상 여러 번 고치고 또 고치기에 항상 쫓기는 기분이다.
늦었지만 오늘은 마음잡고 다른 자료를 찾아볼 생각에 도서관을 가볼 생각이다.
그런데 아뿔싸,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버스를 잘못 탔다. 다시 내렸다가 타느라 또 뭔가 뒤엉킨 느낌이다.
버스가 남산을 타고 올라간다.
모르겠다. 그냥 내려보자.
하얏트호텔 앞 정류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내렸다.
'내가 왜 여기서 내렸지...?'
터벅터벅 걷다 보니 벌써 벚꽃이 가득하다. 일부러 꽃을 보고 내린 것은 아닌데, 의도하지 않았던 꽃구경이다.
'자료는 무슨... 오늘은 그냥 다 그만두고 빈둥거려야겠다... 다 귀찮아....'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밴 나를 아는 친구들이라면 웬일이냐 라고 묻겠지만, 나도 사실은 게으르다. 게으르고 싶은데 그냥, 규칙적으로 사는 게 버릇일 뿐.
한정거장을 걸어 남산 도서관 앞에 왔다. 이제 정말 봄이다.
사람들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늘 빈둥거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중 인디핑크 컬러 바바리를 입은 여자가 서 있다. 갑자기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난 갑자기 그녀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왜 이러지.
"저기, 혹시... 식사라도 함께하지 않을래요?"
#. 그녀
오늘은 휴가.
딱히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이번 달에 연차를 한 번도 쓰지 않으면 나중에 몰아서 사용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냥 냈다.
어제, 친구 A와 잘 지내냐는 카톡을 하던 중이었다.
내가 휴가인데 딱히 약속은 없다고 했더니 A가 말한다.
"그럼 우리 브런치나 할까?"
고속터미널에서 나를 태운 A와 그녀의 차로 경리단길을 향했다.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유명하다는 브런치 가게에서 팬케이크에 크레페를 먹으며 밀린 수다를 떨던 중이었다.
A에게 급히 걸려온 전화.
아이 학원 시간이 바뀌어 당장 가야 한다고, 거듭 미안하다며 A가 자리를 떴다.
'그래, 오늘은 좀 걷지.'
언덕 위를 쭉 따라 올라가니 소월길이 나왔다. 오랜만이다, 이 길.
벚꽃을 보며, 노래를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남산도서관 앞.
이어폰을 빼고 그냥,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 남자가 나에게 손을 번쩍 든다. 그리고 말한다.
"저기, 혹시... 식사라도 함께하지 않을래요?"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네, 그래요."
작년 말 선보인 김동률의 EP <답장>은 한 곡 한 곡이 뮤지컬이나 연극과 같았다.
이 앨범은 정말 김동률의 세상이구나 하는 느낌...
며칠 전 발표한 디지털 싱글 <그럴 수밖에>는 마치 한 편의 단편 드라마를 본 듯했다.
이 곡을 듣자마자 봄날의 소월길이 생각났다.
예전 직장을 다닐 때, 집 앞에서 402번을 타면 소월길을 지나 시청 앞에서 내릴 수 있었다.
탈 때는 사람이 많지만, 한강을 건너면 상당수가 내린다.
소월길을 지나갈 때쯤이면 자리에 앉아서
봄에는 꽃을, 여름과 가을에는 나무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는 벚꽃놀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나...
다시, 내 머릿속의 드라마로 돌아오자.
사실 이 드라마는 이미 배역이 떠올랐다. 그는 이상윤, 그녀는 김하늘.
드라마 '공항 가는 길'을 열심히 봤군...이라고 생각하겠지. 맞다.
장소는 사람이 너무 없어도, 많아서도 안되니 남산 도서관 앞 정류장 정도로 하자.
인디 핑크 컬러 바바리를 입은 김하늘이 혼자서 걷다가 뒤를 한번 돌아보고, 베이지 치노 팬츠에 네이비 카디건, 약간 톤이 다른 네이비 셔츠를 받쳐 입은 이상윤이 갑자기 손을 들어 밥을 먹자고 하는 한 컷의 사진이면 모든 게 끝날 듯하다.
그날의 나는 잠이 덜 깨서
평소에 타던 버스를 놓쳤고
터벅터벅 길을 걷다가 왜 배는 고프고
에라 난 몰라 오늘은 그냥
일이고 뭐고 모두 귀찮다
그날따라 맘이 허해서
지나가는 사람들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왜 그때 거기 서 있었는지
하필 나를 돌아봤는지
모처럼 너는 외출을 했고
친구가 급히 자릴 떠났고
그날따라 날이 좋아서
생각 없이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을 뿐이지만
그도 그럴 수밖에 사랑이라는 건
그럴듯한 시작이 있지
우린 모를 수밖에
누군가 만들어 놓은 우리 이야기이니까
그렇게 눈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지
순간 내가 미쳤었는지
밥이라도 함께 먹자고
불쑥 말해버리고 만 것에
너도 놀랄 수밖에
그러자 했으니
심지어 넌 배불렀는데
나도 놀랄 수밖에
평소에 내가 아닌 듯 거침없는
친구들이 절대로 믿지 못할 내 모습
그도 그럴 수밖에
사랑이라는 건
그 모든 게 다 예외니까
그래 그럴 수밖에
첨부터 우린 그렇게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이니까
- 김동률, <그럴 수밖에>, 2018. 03. 27
24년 차 팬으로...
김동률의 피아노 치는 모습은 멋지지만,
김동률 노래에 가장 잘 어울리는 피아노는 본인이 아니라 나원주다.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어서 앨범을 낼 때 자주 모시는 것은 물론, 콘서트 때도 부탁을 하나보다.
이번에도 피아노를 듣자마자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 느낌은 나원주 아니면 낼 수가 없다.
이번 곡은 정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봄, 봄노래다. 비록 벚꽃엔딩처럼 어디서나 흘러나오지는 않아도, 이 곡을 들으면 '아, 봄날이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을 듯 하다.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