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dame Snoopy Apr 26. 2018

그대, 아직도 이력서를 믿는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할 이유

채용시즌이다.


구직자는 다니고 싶은 회사를 선택하기 전 다각도로 고민하고 알아본다.

회사에서도 자사에 어울리는 인재가 누구인지 분별하기 위해 서류심사는 물론 인적성 검사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채용활동을 한다.


이 중 이력서는 구직자나 회사 측이나 상당히 고민되는 부분이다. 학력은 졸업증명서로 증명이 가능하지만 경력의 경우는? 레퍼런스 체크를 하기는 하나 정말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치고 그만두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떠난 사람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이력서와 연관된 예전 기억을 되살려 본다...

정말 잊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내가 모 회사에서 사보 담당자였을 때의 일이다.

요즘은 많은 회사들이 사보 발행을 그만뒀다. 사보를 PDF로 발행하거나 공식 블로그가 사보의 성격을 띠고 운영되는 곳도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에는 내가 다니던 회사를 포함해 아직 잡지형식의 사보를 발행 중인 곳이 제법 있었다.


사실 사보는 실적에 대한 압박이 없다. 사내에서 임직원들에게 알리고 싶은 내용을 담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오너와 경영진의 취향이 많이 반영된다. 그래서 홍보실 소속이기는 하나 일종의 별동부대 느낌이 강했다. 홍보실에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보팀과 직접 연락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 회사는 새로 지은 신관에 대부분의 부서가 자리했다. 홍보실은 신관에 입주했지만 사보팀은 구관에 남았다(고 한다. 내가 입사하기 전 일이니..) 구관은 창업자인 선대 회장님이 처음 사무실을 연 건물로, 최초 완공은 1930년대 말이라 한다. 물론 몇 번의 리모델링을 거쳤지만 외관만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작은 출판사에 근무하다 우연한 기회에 사보팀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팀 사람들과는 곧 친해졌다.


사보팀에는 팀장(40대 후반의 골드미스)과 유치원생 딸이 있는 남자 부팀장(30대 후반), 그리고 남자 과장 한 명이 전부였다. 종종 계열사에서 파견 나오는 직원도 거쳐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부팀장은 창업주 회장의 막내사위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 없이 착실하게 일했다. 성격도 소탈해,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도 상당히 놀랐다.


이직 후 처음 느꼈던 점은 예상외로 회사생활이 조용하다는 것. 외부에서 보기에는 실적의 압박이라든지 사내 정치가 심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회사의 특징이 아닌 사보팀의 특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장에서 뛰는 영업직이 메인이며, 그 외의 부서들(특히 사보팀같이 뒤로 물러나 있는)은 조용한 만큼 소외되는 면도 있다는 것.


아침부터 인터뷰가 있어 외근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동료와 마주쳤다. 계열사에서 파견 나와있는 박 대리였다. 친정인 계열사에 취재를 나간다고 했다. 약속시간에 늦을 것 같아 서두르는 모양이라 나도 그냥 지나치려 했다.


"아 참, 김 대리님."


잠깐 주위에 신경 쓰는 표정을 짓더니, 그는 내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미 씨가 또-"


일부러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팀장님과."


이거예요, 라며 좌우 검지로 엑스자를 만들어 보였다.


"또? 언제요?"

"한 시간 정도 전인가? 소미 씨가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러더니 조퇴했다고 한다.


"흠.. 곤란하네요."

"이대로 그만둘 작정 인지도 모릅니다. 그야 뭐 상관없지만. 이젠 방법이 없어요."


곤란한 표정에 비하면 쌀쌀맞은 말투다.


"때가 좋지 않네. 카페에 가서 시간을 좀 벌고 올라가야 하나.."

"시간 때울 필요 있나요? 지금은 팀장님 혼자 계세요."


그럼 다녀올게요, 하며 박 대리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잠깐 생각한 후, 뒤이어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팀장은 책상 앞에 앉아 발을 꼬고, 의자를 뒤로 젖히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눈동자만 움직여 힐끗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들었습니다."

"소문이 빠르군."


코트를 벗어 걸었다. 날씨가 추워 며칠째 패딩만 입고 다니는 것이 지겨워 코트를 입었더니 약간 춥다.


"저어, 무슨 문제였나요?"

"말하고 싶지도 않아."


기분이 많이 상한 것 같다.


"그 친구 말로는 내가 리더십이 없다는 군. 기분에 휩쓸리고, 무책임하고 무능하다면서."


나는 조금 전의 박 대리 표정을 지어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건 좀 심하네요.."

"자기 어시스턴트는 자기가 제대로 가르치는 게 어때? 말하는 방법을 좀 가르쳐."

"죄송합니다."


고소미 씨는 사보팀의 파트타임 알바생이다. 팀에서 자체적으로 공고를 내 직접 채용했다. 모집할 때 업무 내용은 '편집 보조'였다. 한 명 모집에 58명의 지원자가 몰려, 팀 전체가 깜짝 놀랐다.


위에서도 말했듯, 사보팀은 인원도 적고 사내에서는 분명 한직이다. 영업직이 꽃인 이 회사에서는 지원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여기서 일하고 싶은 희망자가 그렇게 많았다. 넘쳐나는 이메일 지원서를 보면서, 왠지 제가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라고 한 사람은 분명 박 대리였다.


"그 아가씨 유별나지?"


질문이 아니라 확인하듯이 팀장이 말했다.


"좀 별나죠."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전에 있던 애도 독특하기는 했지만 성격이 밝아서 일하기는 좋았는데. 왠지 그리워지네."


전에 있던 애란 역시 알바생인 이민아라는 여대생이다. 엑셀의 신인데다, 포토샵도 제법 해서 급할 때는 큰 도움이 됐다. 팀장 말대로 명랑한 학생이었다. 다들 '우리 민아 씨'라고 부르며 귀여워했다.


민아 씨가 공무원 시험 준비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것은 그해 봄의 일이었다. 우리도 서운했지만 본인도 무척 섭섭해했다. 조촐한 송별회 자리에서도 눈물을 보였다.


이 사보팀에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바로 보이고, 일하는 것도 바로 드러난다. 이런 공간에서는 알바생이라는 자리가 편하지 않다. 게다가 전임자가 유능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기대치가 높아졌다.


고소미는 그런 가운데 5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나이는 스물일곱 살. 이력서에 따르면 인서울 모 사립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해 비즈니스 관련 서적 전문 출판사에서 삼년 남짓 일한 경험이 있다. 일은 재미있었지만 격무에 시달렸고, 결국 건강문제로 퇴사했다고 했다.

지금은 건강은 회복했지만 다시 그런 일이 있을까봐 정사원이 아니라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면접 때 부팀장과 과장이 모두 외근 중이라, 팀장과 함께 들어간 내가 직접 들은 그녀의 말이다. 인상도 나쁘지 않았다. 진지하고 똑똑해 보였다.



그런 그녀가 이런 트러블 메이커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팀장은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해주었다. 연재 칼럼에 들어갈 일러스트 메일을 삭제한 것이 발단이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아웃룩에서 찾아냈는데, 그때 주고받은 대화가 문제가 되어 고소미가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특별히 심하게 말한 기억은 없어, 난, 그 친구를 꾸짖은 것도 아니야. 그런데 갑자기 확 폭발하더라고."

"좀 전에 박 대리 말로는 소미 씨가 그만두는 게 아니냐고 하던데요."

"글쎄."

팀장은 얼굴을 찡그렸다.

"내 생각엔 자기가 그만두기보다 나를 그만두게 할 작정이 아닐까?"

"그럴 리가요."

나는 웃었다.
 
" 그 친구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고객의 소리 게시판에 올린다거나."


그렇게 말하고 팀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언론에 제보하겠다고 하던걸."

"상대해 주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문제가 될 일을 한 건 아니니까요."

"정말?"

"네, 자신감을 가지세요."

"자신이 없는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팀장은 기운이 없었다. 화가 나는데도 한편으로는 기운이 빠진다는 건 상당히 괴로운 심정 이리라.


팀장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고소미 때문에 대체 몇 번이나 쓸데없는 말다툼이 일어났는지. 우리 모두 지쳐있었다.

"이젠 어쩔 수가 없죠. 소미 씨에게 그만둬 달라고 해야겠습니다. 그게 제일 낫겠어요."


팀장이 내 얼굴을 보았다.

고소미가 여기서 근무하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바로 깨달았다. 그녀는, 적어도 본인 스스로 이야기한 만큼 편집 일을 잘 아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맞춤법도 자주 틀렸다. 오피스 프로그램도 잘 사용하지 못했다. 원고를 받아오면 기본적인 흐름을 정리하는데 대부분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가져온 적이 없었다.


지적을 하면 이전 직장과 방식이 달라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변명했다. 프로그램은 버전이 달라 그렇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처음에는 다들 대범하게 넘어갔다. 하지만 사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녀를 제외한 우리 다섯 사람은 몰래 수군거리게 되었다. 분명 우리가 편집하는 것은 사보라고 하는 내부 출판물이라 넓은 세상을 모른다. 우리 방식으로 처리하는 일도 있으리라. 그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잘 나가는 출판사에서 건강이 악화될 만큼 바쁘게 일했다는 편집자 출신이 그런 우리도 아는 것을 모르고, 그런 우리도 일상적으로 잘 처리해 내는 일들을 못하다니. 이건 이상하지 않은가?


고소미에게 그런 질문을 직접 던지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당황하거나, 곤란해할 때에는 기꺼이 가르쳐 주었다. 누구에게나 상황은 다를 수 있는 법, 빨리 일을 익히게 하면 된다.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사내에서 한직이라고 여기는 사보 팀원들은 타 부서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내부적으로는 서로에게 친절하고 결속도 잘 되는 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의 업무를 누군가가 계속 봐주고 있는 상황이 지속됐다.


유명한 필자를 여러 명 알고 있다고 했다. 기업 PR지도 많이 손을 댔다고 했다. 어떤 기업이냐고 하면, 역시 유명한 회사의 이름을 늘어놓았다.


드디어 우리는, 이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소미 씨가 친하다는 필자의 책을 몇 권 보았는데, 전에 일했다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다 아니었어."

"소미 씨가 있었던 출판사에서 했다는 PR 지, 외주가 아니라 사내에 편집부가 있던데."


그 시점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팀장이 머뭇거리기에, 오 과장이 고소미의 이력서에 적힌 출판사에 연락을 해 보았다.

회사와 이름, 직책을 밝히고, 그쪽에 고소미라는 사원이 근무했던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상대방은 고소미의 이름을 되물어 확인했다. 그리고 아주 간단하게 '예,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있었다는군요."

오 과장은 수화기를 손으로 가리고 목소리를 죽여 우리들에게 말했다.


" 그쪽에서는 얼마나 근무했습니까?"

이번 질문에는 저쪽에서도 꽤 길게 말을 했다. 이미 퇴직한 사람이라도 중요한 개인정보를 전화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 이리라. 그리고 전화를 끊어버려, 오 과장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직접 가서 물어볼까요?"

내 제안에 팀장이 말했다.

"이제 됐잖아. 고소미가 그 출판사에 다녔다는 건 확인했으니까."


팀장의 의견으로 이 건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일단 이력서가 거짓은 아니라는 사실을 안 이상 동료의 신변에 대해 캐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는 팀장의 권위 있는 한 마디가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하지만 불씨는 남았다. 사람들이 그런 분위기면 상대방도 느낌을 받는다. 아마 그녀가 일하기 시작한 지 세 달쯤 지났을 무렵부터 그녀의 태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실수를 지적하면 전에는 바로 사과하고 고쳤는데, 항변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변명을 늘어놓다 더욱 심해져 공격적으로 나왔다.


"아니, 처음엔 이렇게 하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대로 한 건데. 제 실수가 아니에요."

"그런 이야긴 듣지 못했어요."

"어째서 모두 저 때문이라는 거죠? 제가 알바생이기 때문인가요? 그건 불공평해요."


고소미는 내 어시스턴트였다. 몇 번이나 타일렀다. 내가 나서서 무마하기도 했다. 덕분에 약간 평온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면 다시 사소한 트러블을 일으켜 원상태로 돌아오는 상황이 반복됐다.


"지금까지 많이 참으셨어요. 솔직히 이상했습니다."

"왜 그 친구를 쫓아내지 않는지 다들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었어."

"이유가 있으셨나요?"

"약간. 뭐 내 체면이랄까? 나도 까다로운 사람을 잘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 우린 느슨한 조직이잖아? 난 제멋대로고."


무슨 말을 들었나 보구나. 


"누가 뭐라고 하던가요?"

"글쎄"하며 딴청을 부린다. "다만 말이야. 늙은 여직원이 밀려온 곳 치고는 여기 팀장 자리는 괜찮은 거 아니야? 난 속 편한 신세지. 그래서 이따금은 고생스러운 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다들 어려운데도 참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고소미 씨는 조용히 회사를 그만두었을까?
그렇다. 그만두긴 했다.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고, 또 그만둔 후에도 어마어마한 사건을 계획했다.

나는 그 이후로 사소한 아르바이트라도 이력서에 쓴 내용은 모두 확인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녀가 저지른 어머어마한 사건이 궁금해지셨다면, 미야베 미유키의 <이름 없는 독>을 읽어봐 주시길. 꽤나 재미있다.


내가 쓴 이 글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꾸며낸 이야기일까? 사실은 다 이 책을 소개하기 위해 꾸며냈다. 상당 부분 이 소설에서 차용했음을 밝혀 둔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712359



+ 이 리뷰 아이디어는 북스피어 김홍민 대표님이 한겨레신문에 연재 중인 <김홍민의 탐정놀이> 코너에서 얻었다.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라고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