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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ul 11. 2019

그저 마음이 들떠서, 통리

#9 어쩌다가 ‘강남수향’, 쑤저우 통리同里


통리同里 가는 길 

   

이른 아침 쑤저우 시내 4호선 三元坊싼위엔팡역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통리 행 지하철을 탔다. 서울에서 준비할 때는 시외버스와 지하철을 두고 결정을 못했지만, 막상 가려니 생각할 것도 없이 발걸음은 멀리 있는 터미널보다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이른 아침이지만 교외로 나가는 노선이라서 그런지 사람도 붐비지 않고 쾌적하다. 통리 마을에 가려면 종점에 내려서 옆에 있는 725번 버스를 한 번 더 탄다. 네 번째 정류장이 통리 고진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지 관광객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내리는 곳에서 내리면 된다. 아무리 쉬운 곳이라도 늘 현지인에게 한 번쯤 확인하기 위해 물어보는 것은 습관이 되었다. 내려서 길을 건너면 KFC 할아버지 그림과 인포메이션센터가 있다.

시외버스는 통리에 한 번에 도착하므로 숙소가 쑤저우 터미널과 가까운 쑤저우 북쪽에 있다면 시외버스를 타고 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쑤저우 시내에서 약 1시간, 이른 아침이어서 한적한 마을 통리는 빛으로 가득하다. 쑤저우 인근 수향 마을인 루즈甪直(록직)와의 저울질에서 유네스코에 등록된 쑤저우 전통 원림인 투이쓰위안退思園(퇴사원)을 보고 싶어 선택했지만 마치 우리말의‘동네’를 연상시키는 ‘통리’라는 정겨운 마을 이름은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당 시대 이전 원래 마을 이름은 부토富土였다고 하다. 마을 이름으로 ‘우리는 부자요’하고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순간 마음이 꼬이지만, 마을이 지나온 이야기를 조금만 알아도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부만이 아니었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어쨌든 부토는 铜里(구리 동)로 바뀌었다가 송 대에 통리同里라는 서민적인 이름으로 다시 바뀌었다.  

 

중국 에서 족발 요리는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통리에서는 '장원제', 선비들은 이것을 꼭 먹어야 한다고.


마을 입구에는 돼지고기를 파는 집이 즐비하다. 마을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돼지고기 요리는 중국 어디든지 있는 것을 보면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의 돼지고기 사랑은 대단하다. 보기에도 돼지족발인 이 요리의 이름은‘장원제狀元蹄’이다. 중국인들은 통리에 가면 꼭 먹어야 하며 이곳의 돼지족발을 사 가기 위해 일부러 방문하기도 한다고 한다. ‘장원제’라는 돼지족발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통리는 선비들의 꿈인 장원급제를 했거나 사회에 공헌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마을이라고 한다.

587년 수나라에서 시작된 과거제도는 1905년 폐지될 때까지 지속된 것을 보면 넓은 중국에서 중앙집권적 관리체제를 위한 매우 효과적인 탁월한 통치 수단이었으며 일반인이 입신양명하기에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동쪽에 있던 작은 나라 고려의 광종은 이 제도를 받아들였으며, 양날의 검처럼 과거제도의 그늘로 인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로 학벌과 스펙에 집착하는 국민이 되었다.   

 



땅이 사람을 낸다는 말이 맞다면 통리야말로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들은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장원급제한 사람뿐만 아니라 통리에 뿌리를 둔 이름난 인물들은 매우 많다. 그중 관심이 가는 사람은 1634년 중국 최초로 조경 서적 원야園冶를 저술한 명나라 때의 지청計成(1582~1642)과 퇴사원을 만든 임란생任蘭生의 아들 임전신이다.    


당시의 쑤저우 전통 원림은 건축과 원림에 시와 글 그리고 그림까지 어우러진 하나의 거대한 무대이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종합예술이 구현되는 장이었다. 지청計成은 쑤저우 전통 원림에 가장 중요한 기본 요소를 정립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청대를 비롯한 후대에 더욱 구조적으로 풍부하고 아름다워진 전통 원림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임전신과 전족


임전신任傳薪(1887~?)은 그의 아버지 임란생과 화가 원룡의 작품인 퇴사원에 유명한 학자와 교사들을 초빙하여 女則女校라는 여학교를 열었다. 그의 나이 불과 열아홉 살의 일이다. 이후에도 그는 부친에게 물려받은 원림의 일부를 매각하면서까지 여성들의 현대적인 교육에 헌신하였다고 한다. 통리 숭본당에서 여인들이 사용하던 아기신발 같던 전족 신발을 불쾌한 마음으로 봤던지라 임전신의 거침없는 행동과 실천은 전족의 이미지와 맞물려 빛처럼 다가왔다. 임전신의 여학교가 퇴사원에서 개교하고 몇 년 후,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전족은 악습으로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전족은 10세기경 송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긴 악습으로 여아는 5살 경부터 발을 동여매었다. 구부려서 모아진 발은 약 10센티미터 정도의 신발을 신고 5년 정도 살면 발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발만 흉측해졌을까, 몸을 지탱하던 발이 그 모양이니 몸도 자라지 못하고 자신의 발처럼 초라하게 변해갔을 것이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신발을 통리 숭본당의 전시실에서 피할 틈도 없이 보았다. 전족 신발이란 것을 알아차린 순간에는 노여움에 가슴이 통증으로 아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비인간적인 폭력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동일시하는 감정이 대책 없이 지나치다.   

  

숭본당에서 본 전족신발, 제일 작은 신발은 5, 6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숭본당의 지붕


먹고 싶은 마음보다 눈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강한 족발요리 집들 사이로 쌀로 만든 과자를 파는 집들이 보일 때는 문만 열려있었다면 들어가서 쌀 과자 봉지 하나 집어 들었을 것이다.


수향 마을은 각종 물산이 모이는 곳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마을마다 거래하던 물류가 정해졌는데  통리는 곡창지대이며 쌀이 모이는 집산지였다. 통리에서 돌아오는 길, 전통으로 내려온 쌀 과자를 안 먹은 것이 내내 후회되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통리 지도를 보면 7개의 작은 마을들은 섬처럼 되어있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처럼 마을 사이를 물길이 지나가며 마을들은 작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혹 지도 밖에 섬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도에 보이는 작은 2개의 섬까지 합하면 9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세다가 자꾸 틀리지만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작은 다리는 40여 개를 훌쩍 넘어선다.  

  

인포메이션센터에서 10분쯤 걸었을까, 패방을 지나 마을 초입 다리 위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돌다리 위에 나무로 장식한, 보기에도 오래된 독특한 다리가 보인다. 운하 위에 큰 배가 지날 때 양쪽이 위로 들리도록 설계된 다리인 도개교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리 바닥은 나무가 아닌 돌로 되어있다. 1746년 만든 태래교泰來橋이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에서 1888년 경 즐겨 그린 도개교 그림들이 떠오르는 풍경이다. 운하의 나라 네덜란드 사람인 그는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에 네덜란드 기술자가 설계한 운하 위에 걸쳐진 다리를 즐겨 그렸다. 고흐는 도개교인 레지넬 다리를 조작하던 관리인 랑글루아의 이름을 빌려 랑글루아 다리The Langlois Bridge라고 불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태래교에 가서 도개교의 흔적을 확인하는 것을 생각조차 안 했다. 그저 마음이 들떠서.   

 

고흐의  도개교 그림이 생각나는 다리 태래교
태래교 반대편 풍경


다리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명청가가 위치하며 큰길의 이정표를 4, 5분 따라가면 퇴사원이 나온다. 퇴사원이 있어 통리에 왔지만, 물길을 따라 난 수향 마을의 정취가 더 좋다. 왼쪽에는 물길을 중심으로 통리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그 유명한 세 다리(三橋)가 만나는 다운타운이다. 물길의 오른쪽에는 숭본당이, 왼쪽에는 가음당이 위치한다. 이곳이야말로 통리를 상징하는 곳이다. 통리를 일컬어 일원이당삼교一园二堂三桥라고 부르는데  一园은 퇴사원이며 二堂은 숭본당崇本堂과 가음당嘉蔭堂, 三桥는 태평교太平桥와 길리교吉利桥, 장경교长庆桥이다. 세 개의 다리는 品자를 이루며 모여 있다.  

 

태평교
길리교
장경교, 일명 사가교라고도 부른다.


아직은 한산한, 수로가 보이자마자 꽤 비싼 표를 구입하고 도열해있는 빈 배에 훌쩍 올라탔다.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하면 한적한 뱃놀이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석축으로 만들어진 수로 변은 언제든지 주민들이 물에 빠른 접근이 가능하도록 꽤 조밀하게 물길까지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계단에서는 배를 대거나 탈 수도 있으며 쌀과 채소를 씻거나 서너 집 건너에서는 빨래를 하기도 한다. 물이 흐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수로에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청소하는 배는 동이 트는 새벽부터 하루 종일 운하물길을 지나다니며 혹시나 떠다니는 오물을 수거한다. 처음에는 직업 청소부라고 생각했지만 자주 볼수록 동네 사람들이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할 것 같았다. 누가 청소하든지 물길 청소는 운하를 만들어 생활했던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지켜온 약속이었을 것이다.    

청소를 하다가 피곤해지면 이웃집 그늘에 배를 대고 잠시 오수를 청하기도 한다. 수도하듯이 묵묵히 물길에서 쓰레기를 건져내는 청소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다운 수향의 풍경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수향 마을 통리


내가 사는 대한민국 서울 양천구에는 안양천이 지나간다. 물이 2 급수는 되는지 허벅지만 한 숭어부터 다이어트가 필요한 육중한 잉어, 반짝이는 붕어 떼와 사랑스러운 피라미들까지 물고기가 지천이다. 뛰어나진 않지만 사계절 꽤나 낭만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강변을 산책하면서 가끔은 스티로폼이나 비닐, 작은 페트병 같은 쓰레기들이 떠내려 오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은 쪽배 한 대 띄워 수향 마을 청소부 아저씨처럼 긴 막대기로 강바닥을 짚어가며 쓰레기를 건져내고 싶어 진다.     


퇴사원退思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쑤저우 고전원림에는 졸정원拙政园, 유원留园, 망사원网师园, 환수산장环秀山庄, 창랑정沧浪亭, 예포艺圃, 사자림狮子林, 우원耦园, 퇴사원退思园이 포함되어있다. 8개의 다른 원림은 쑤저우 시내에 있지만 퇴사원은 유일하게 쑤저우 근교인 통리에 위치한다.   

  

청대의 임란생任蘭生 면직되어 돌아온 고향에서 1885년에서 1887년 경 화가 원룡의 도움을 받아 퇴사원退思园을 만들었다. 수변 주변의 배치는 얼핏 보면 쑤저우 시내에 있는 망사원网师园의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조금만 눈여겨봐도 두 원림의 분위기는 너무나 다르다.

망사원은 밝고 청량하며 시야가 시원하고 때론 도도하지만 퇴사원은 매우 화려하지만 겸손하고 다정하며, 지붕선의 우아함과 수면의 고요함이 조화를 이룬다. 높은 뷰에서 연못을 바라보면 건축물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느낌이 들도록 머리를 맞대고 있다. 좁은 원림을 넓게 보이게 하기 위해 건축물들의 시선을 서로 엇갈리게 배치했던 망사원과는 다르다. 가장 최근에 조성한 원림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오래된 원림처럼 보이는 것은 모든 건축물이 수면 위에 떠있는 듯한 고요함으로 인한 것인가.   


임란생任蘭生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퇴사원에 그의 아들 임전신은 이제 막 깨어나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여학교를 세우고 미래의 희망인 소녀들의 웃음소리를 담았다. 퇴사원이 다른 원림보다 특별하고 아름다운 이유이다. 쉬는 시간 와글와글 여학생들의 떠드는 소리가 원림의 꺾어진 회랑을 타고 들려온다.   


정자조차 화려하다.
요홍일가(왼쪽 나무창이 있는 건물)와 퇴사초당(초당이기엔 너무 화려하지 않나)

진주탑珍珠塔  

  

퇴사원 외에 통리에서 꼭 봐야 할 곳은 진주탑이다. 진주탑이란 이름만 듣고 들어가면 도대체 탑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진주탑珍珠塔은 고택과 원림, 공연장으로 조성되어 있는 곳으로 중국 전통 설창说唱문학 중의 하나인 탄사彈詞가 태어난 곳이다. 배우가 설명하고 노래하는 체제의 문학을 설창 문학이라고 하며 그중의 하나인 탄사彈詞는 주로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진주탑珍珠塔은 <효의진적진주탑전전孝義眞跡眞珠塔全傳>이라는(줄여서 진주탑) 장편 탄사彈詞작품이 탄생한 곳이며 고택에 있는 고희대에서는 진주탑을 공연하기도 한다.  


주인공 진취아陳翠娥와 사랑하는 사이인 방경方卿은 진왕도의 아내, 즉 취아의 어머니이며 방경의 고모인 방 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난 끝에 과거에 합격하여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는 내용이다. 집안의 어른인 취아의 어머니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표현한 것이니, 여성을 나쁘게 표현한 내용으로 괜스레 맘이 안 좋다. 우리나라의 춘향전과 비슷하나 시기상으로 춘향전은 훨씬 후대(18세기)의 작품이다. 어느 땅이든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사랑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서인 탓일 것이다.    

   

고택은 명나라 사람 진왕도陈王道(1526~1576)의 집이며 진취아陳翠娥는 그의 딸이니 전통문학작품의 탄생지와 주인공이 확실한 것이 매우 특별했다. 진주탑은 취아가 마을을 떠나는 방경에게 정표로 준 작은 탑이며 고택 안에는(나중에 만든 것이겠지만) 탑의 모형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진주탑珍珠塔은 취아가 방경에게 준 진주탑이기도 하며 탄사 작품 이름 <효의진적진주탑전전孝義眞跡眞珠塔全傳>에서 가져온 이름이기도 하다.  

  

공연을 하는 고희대의 용마루 양쪽에는 용 두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으로 꾸며져 있고(용두는 원래 궁궐에서만 사용되는 장식이 아닌가?) 공연장 뒤쪽으로 배우들이 드나드는 회랑이 양쪽으로 나 있으며 금방 공연이 끝난 것처럼 현실적인 사람 냄새가 난다.


지붕 위 마루에 있는 것은 분명 용 두 마리였다. 고희대 옆으로 담장처럼 보이는 것은 무대 뒤로 통하는 회랑이다.
 
진주탑 원림의 연못, 다른 원림의 건축물에 떨어지지 않는다.
쇠락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진주탑 원림 정경


운하는 집 안까지 연결되어 있어 수로에서 바로 들어올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개인 수로까지 갖추어진 당시의 고택과 원림을 보고 싶다면 진주탑이 답이다.


집안으로 연결되어 있는 개인 수로
맞은 편에는 배를 주차해 놓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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