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푸른 섬이기에 대청靑도라 불렀다.

# 한국의 섬 - 대청도

by 그루

소청도에서 대청도로

백령도에서 오전 7시 배로 소청도에 들어갔으니 온전히 하루를 소청도에서 보냈다. 늦은 오후 대청도로 가기 위해 항구로 내려왔을 때는 종아리가 묵직한 것이, 소청도 경사 길을 오르락내리락 한 거리가 족히 삼만 보 이상이다. 여객선 대합실에 맡겨놓은 배낭을 찾았다.


소청도에서 대청도까지는 배로 약 10분 거리다. 어둠과 함께 대청도 선진포 선착장으로 들어왔다. 반짝이는 불빛들을 보니 소청도와는 달리 항구 가까이에는 민가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예약한 펜션 사장님께서 바로 알아보신다. 한참을 달려서 농여 해안 근처의 숙소에 내렸다. 대청도의 크기는 소청도의 4배이다.

대청도지도

삼각산 트레킹


아침에 보니 펜션 앞으로 버스가 지나간다. 시간만 잘 맞춘다면 등반 시작점까지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펜션 주인아저씨께서 우리의 일정을 묻는다. 삼각산 등반을 하고 이어서 서풍받이까지 다녀올 예정인데, 서내동과 매 바위 중에서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매바위에서 시작하는 것이 풍광을 즐기며 산행을 하기가 좋다고 하신다.


매바위에서, 왼쪽으로 매의 머리와 부리 모양의 수리봉이 보인다. 이어진 해안은 모래울 해뱐


매 바위 전망대서 삼각산 등반을 시작했다. 매 바위 전망대에서 보이는 해안에 엎드린 수리봉은 잘생긴 매의 머리 모양인데 매 한 마리가 바다에 편안한 자세로 날개를 펼친 모습이다. 안내판에 있는 내용에 의하면 대청도에서 고려시대에 매 채집을 하였으며 서내동에 있는 매막골은 해동청(송골매)을 채집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1270년경 무신정권이 끝나가던 무렵 원나라의 간접지배를 받던 충렬왕 때부터 장산곶과 대청도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매는 인삼, 공녀와 함께 원나라에서 요구하는 중요한 공물이었다. 그들의 수탈을 충족시키기 위해 매를 잡아 사육하여 관리하는 응鷹(매 응) 방坊이란 기구가 많을 때는 전국에 200여 곳이 넘었다. ‘동쪽에서 바다를 건너 날아온 푸른 매’라는 뜻을 가진 해동청海東靑이란 이름도 원나라에서 만든 이름이다.


대청도는 지금은 남한의 육지와 먼 거리에 있지만 황해도 장산곶과는 지척이다. 장산곶과 19킬로미터 거리에 불과한 이곳은 원래 황해도 장연 군에 속했다. 작은 배라도 누구나 쉽게 건너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4박 5일 백령, 대청, 소청도를 여행하는 동안 바다를 쳐다보면 매일 눈앞에 아른거리는 땅은 황해도 장산곶이었다.

삼각산은 섬 밖 소청도에서 바라보면 완벽한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시작점부터 경사로가 급격한 것이 역시 밖에서 보이는 삼각형의 경사 각도다. 트레킹화가 아닌 등산화를 신고 올 걸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거친 돌길이 많지만, 한 구간씩 오르면 나타나는 능선에서 보이는 시원하게 보이는 해안 풍경은 자주 발길을 붙잡는다.

대청도를 다니다 보면 대청 초교, 모래울 해변, 서풍받이 등 원 순제(명나라에서 지칭)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장소들이 꽤 있는데 이곳 삼각산에도 원순제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 한복은 물론 김치까지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행태를 보면 이런 일화들까지 이용하여 그들의 중화 원리에 끼워 맞추려고 할까 봐 지레 겁이 나기도 한다. 대청도는 원나라의 왕자 토곤 테무르(순제, 또는 혜종)가 11세 때 유배된 곳이다. 그는 명종의 아들로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계승 순위에서 밀려났다. 11살의 나이에 1330년 7월, 대청도에 유배되었는데 1년 5개월 후 고귀한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시 멀고 환경이 열악한 중국 광시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원으로서는 고려의 땅인 대청도는 육지와 가까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섬으로 황족들의 유배지로 사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는 원나라의 간섭기였는데 왕은 폐하가 아니라 전하가 되었고 태자는 세자로 강등되었다. 고려가 마음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실상 속국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은 어린 토곤 테무르는 원의 15대 칸(재위 1333년~1368 순제 또는 혜종)이 된다.


정상에서 광난두 정자각 쪽으로 내려왔다. 9시 20분경 시작한 산행은 광난두정자각에 11시 40분경 도착했으니 산행을 너무 쉬엄쉬엄 했는지 두 시간 계획이 오버되었다. 바람이 심한 날씨 탓인가, 사람 하나 찾을 수 없지만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큰 어려움은 없었다. 광난두 정자각에 도착하니 심한 바람은 더욱 거세다.

대청도의 호위무사 서풍받이


대청도에서 가장 만나고 싶은 풍경은 서풍받이였다. 이름까지 자신감이 넘치는 서풍받이는 평범한 블로거의 사진 속에서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이국적인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

광난두 정자각에서 서풍받이로 들어가는 길에는 정확한 이정표가 없다. 평소에는 찾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는데 인적 하나 없으니 잠시 망설였다. 정자각 아래 파란색 지붕이 있는 건물 쪽을 향해서 들어가면, 서풍받이까지는 중간에 길이 한 번 갈라지지만 길은 이어져있으므로 어쨌든 도착한다. 서풍받이로 향하는 해안 절벽길은 삼각산 길에 비해서는 어렵지 않은데 다가갈수록 바람은 점점 더 심해진다. 대갑죽도가 바로 보이는 사자바위를 지나면 서풍받이의 장쾌한 모습이 나타난다.

사자바위에서 보이는 대갑죽도, 사람 얼굴 모습인데 입을 벌리고 있다.
규암 덩어리인 서풍받이


큰 카메라는 몸에 걸었다. 전망대의 기둥에 몸을 지탱하고 간신히 손을 뻗어 한두 번 셔터를 누르는 것도 힘들다. 손아귀에 쥐고 있는 휴대폰 카메라는 날아버릴 것만 같다. 다가갈수록 더욱 거세지는 바람은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거대한 100여 미터 높이의 밝은 색 규암 덩어리로 된 수직 절벽인 서풍받이의 몸에서 뿜어내고 있는 것 같다. 바람소리만이 허용되는 이 언덕에서 두 사람의 말소리는 바람 속에 녹아버렸다. 인간의 몸 따위는 가볍게 날릴 것 같은 포스가 작렬하는 서풍받이의 바람을 만나러 온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에 부는 바람의 방향은 주로 서풍이나 남서풍으로 전체 바람의 70~80퍼센트 이상이다. 지리적으로 바람 잘날 없는 곳이건만 믿음직한 서풍받이는 대청도를 지켜내는 호위무사 같다.


서풍받이의 바람에 막혀 호수같은 기름아가리 해안

바람 때문에 한 발자국 내딛기가 힘든 오르막 언덕에서 내일 아침 부고란에 대청도 서풍받이에서 바람에 날려 굴러 떨어져 죽은 한 여자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죽음을 상상했다. 사나운 날씨에 서풍받이를 방문한 그녀의 무모함은 산 자들을 위로할 것이다. 여자보다 조금 더 영리한, 몸무게가 좀 더 나가 굴러 떨어지는 것을 면한 한 남자는 그 여자가 떠난 후 넉넉하게 사흘은 밤낮으로 통곡했을 것이다.

마치 어떤 사나운 바람이 불어온다 해도 절대 깎여 나가지 않을 것 같은 서풍받이의 웅장하고 말쑥한 몸은 어떤 풍광과의 비교를 불허한다. 대청도 남쪽 끝자락의 서쪽인 서풍받이에서 고개만 돌리면 동쪽이다. 내가 굴러 떨어진다면 동쪽의 기름 아가리 해변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서풍받이가 사나운 바람을 막아주므로 동쪽에 있는 기름아가리와 독바위가 있는 바다는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수려하기가 그지없어 눈길을 뗄 수 없다. 대청도 남쪽에서 서쪽과 동쪽을 만날 수 있는 이곳은 가장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장소이다.

서풍받이를 서둘러 나오면서 연둣빛으로 서풍받이 언덕이 물든 아름다운 봄날, 이곳을 다시 찾는 꿈을 꾸었다.

서쪽에는 서풍받이(왼쪽)가 있고, 고개를 돌려 동쪽을 바라보면 잔잔한 기름아가리 해안(오른쪽)이 있다.


광난두 정자각으로 돌아왔다. 약 4시간에 걸친 삼각산 트레킹과 서풍받이 트레킹은 짧지만 강렬했다. 정자각에 멍하니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있으니 지금까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버스는 사람이 타야 움직이는 것 아닌가. 계속된 트레킹으로 몸을 아껴야 했지만, 그렇다 해도 오후에 다른 약속이 없었다면 아마도 터덕터덕 펜션까지 걸어왔을지도 모르겠다. 대청도에 유일한 택시기사님 전화번호를 알아놨었다. 기사님께 전화를 하니 5분도 안돼서 오신다.

'사리'와 '조금'


물이 밀고 들어오는 밀물과 나가는 썰물은 하루(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24시간 49분)에 두 번씩 들고나간다. 밀물에서 바닷물 높이가 가장 높은 때를 만조라 하고 썰물에서 바닷물 높이가 가장 낮은 때를 간조라고 하며, 만조와 간조의 차이가 가장 큰 때는 '사리'이며 가장 작은 시기는 '조금'이다.

섬을 여행하면서 소위 물 때(사리와 조금)라는 것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여행을 계획했다가는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처럼 해안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사리 때 썰물 현상이 나타나는 시간에 나가는 것이 좋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소멸된 원시의 바다 농여 해안


오후 3시가 조금 넘으니 약속을 한 지질공원 해설사님께 전화가 왔다. 빨리 나오라고. 날씨가 심상치 않으니 조바심이 나신 게다. 소청도 분바위와 스토로마톨라이트를 안내해주신 소청도 지질 공원 해설사님의 안내를 받고 난 후 대청도 지질공원 해설사님과 급하게 약속을 잡았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 때문인지 농여 해안은 마치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소멸된 원시의 바다를 연상시킨다. 광활한 풀등 사이로 수로처럼 나있는 반짝이는 물길은 공활한 해안선에 생동감을 더한다. 이미 유명한 나이테 바위는 퇴적층이 강한 지각 변동으로 지층의 경사각이 90도에 가까운 모습으로 된 후, 풍화와 침식으로 필요 없는 지층은 다 녹여낸 듯, 농여 해안을 상징하는 모뉴먼트가 되어버렸다.

다음날 오전에 다시 나간 농여해안, 물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 혹은 나가고 있는 것일지도.
나이테 바위라고 부른다. 지층의 경사도가 90도에 가깝다.
나이테 바위의 뒷모습

나이테 바위뿐이 아니다. 미아동 해안까지 연결되어 있는 해안에는 자연과 시간이 깎고 다듬어 놓은 흔적들이 펼쳐져 있다. 약 10억 년 전, 찰랑거리는 물결의 기록인 흔들리는 밭고랑을 닮은 연흔 위에 조심스레 발을 내딛어도 발자국은 전혀 찍히지 않는다. 마주 보이는 백령도의 단단한 사곶 해안을 떠올렸다.


농여 해안을 나가면서 보니 진입로 양편은 물론이고 내가 묵는 숙소 근처까지 모래언덕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사구 위에는 소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해안선사구를 깊게 밀어서 농여 해안 진입로를 만든 것이다.

풍경은 곧 자연과 사람이 같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개발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이 땅을 존재하게 하는 바람과 모래와 바다 그리고 이곳에 기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


농여 해안에 연결된 사구가 지금도 있었다면 끝없는 풀등이 펼쳐진 해안선의 원시적인 느낌에 더해 이국적이며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했을 그때를 상상한다.

직물이 짜인 문양과 비슷하다. 다양한 연흔을 볼 수 있는 미아동 해안
늦은 오후의 미아동 해안
미아동 해안의 물결무늬들, 이것을 연흔이라고 한다.


옥죽동 사구, 너와 나 다 같이 공존하는


농여 해안에서 가깝다고 생각했던 모래사막(사구)은 생각보다 멀었다. 늦은 오후 사나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지질 해설사님은 옥죽동 모래사막까지 안내해주신다. 이정표도 확실하지 않고 안내하는 분이 없다면 많이 헤맸을 것이다. 바로 있을 것 같은 모래사막은 방풍림으로 조성한 소나무 사잇길을 지나고도 한 참을 들어간다. 원래의 모래사막 위를 지나오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소나무들을 보며 “모래에 심은 소나무가 이렇게 실하게 자랄 수가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지질공원 해설사님 입에서는 볼륨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죽으면 또 심고 다시 또 심는 것을 반복하지요.”


파헤쳐지고 다져진 사구였던 길을 지나 모래사막으로 들어가니 아, 모래사막은 빽빽한 소나무 방풍림으로 꽉 막혀있다. 옥죽포 해안이 썰물이 되어 햇빛에 노출이 되면 마른 모래가 바람에 실려 산을 넘어 만들어진 사구이다. 주민들의 생활에 큰 불편을 주는 모래는 20여 년 전부터 조성된 방풍림에 의해 막혔으며 지금은 원래보다 1/5 넓이로 좁아졌다고 한다. 자유롭게 움직이던 생명체들이 이곳에 도착해서 옴짝달싹 못하고 오랜 시간 갇혀있다는 생각은, 우리에 갇혀 희망 없이 뱅뱅 돌며 점점 늙어가면서 작아지는 동물들 신세 같았다. 하물며 작은 수로에도 물고기가 지나가는 길을 만들어 주는데, 너와 나 다 같이 공존하는 해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결코 아름답거나 특별해보이지 않았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해준 옥죽동 해안사구


대청도 주민들과 모래와의 싸움은 퍽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멀리서 보기에 짙푸른 섬이기에 대청靑도라 불렀다. 대청도에 들어오던 날 숙소 주인장의 차를 타고 들어오면서 처음 눈에 띈 것은 길 옆에 서있는 자태가 고운 소나무들이었다. 서풍받이 근처 모래울 해안 뒤쪽에는 멀리서 봐도 짙은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에 원나라의 순제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방풍림으로 조성한 소나무 숲은 있었던 것 같다. 바람에 몰려든 모래가 얼마나 심하면 마을 이름이 모래울이었을까. 농여 해안에 있던 사구의 흔적이라든가, 옥죽동 해안사구 등에서 대청도 주민들의 애환을 짐작할 수 있다.

접근이 쉽지 않아서 많은 것이 원형 가깝게 남아있을 것 같은 짙은 녹색의 섬 대청도에도 개발과 보존의 두 힘이 부딪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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