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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grationi 왕가의 고향'Kudaisi'

# 쿠다이시

by 그루

트빌리시에서 4시간 이상 거리에 있는 조지아 제2의 도시 쿠다이시 Kudaisi는 이메리티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기원전 6세기에서 AD1세기까지는 고대 콜키스왕국의 수도였고 바그라트 3세(975-1014)에 의해 건설된 조지아(사카르트벨로) 왕국의 수도(975~1122)였으며 바그라티오니왕조의 고향이라고 볼 수 있는 고도이다.


11세기 바그라티오니왕조의 다비드 4세(1089~1125)는 조지아를 크게 번영시켰으며 1122년에는 조지아의 통일을 이루며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겼다. 데메트리우스 1세(1125~1156)와 기오리기 3세(1156~1184)를 거치면서 번창한 조지아는 타마르여왕(1184~1214) 시절에는 최고의 황금기를 이룩한다.

쿠다이시의 중심 도로

인구 20여 만 명 정도의 도심은 평범한 소도시 이상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규모가 큰 바자르와 아름드리 나무들이 있는 넓은 공원 외에는 도심에서 옛 영화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약간만 도심에서 벗어나면 영광스러웠던 중세 조지아의 영화를 유추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수도원과 교회들이 남아있다.

숙소 앞에서 건설왕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다비드 4세가 세우기 시작했다는 겔라티Gelati수도원과 Motsameta수도원을 가자고 하니 20 라리라고 한다.

드라이버아저씨는 유쾌하게도 디제이를 자처한다. 여유 있는 기사 아저씨의 모습에 절로 어깨도 으쓱거려지고, 드라이버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악에 우리들이 몸도 마음도 흔들어주니 더욱 신나 하신다. 덥지만 않다면 트레킹 삼아 걸어도 될 만한 아름다운 길이다.

모츠메타Motsameta Monastery


오솔길에서 다비드 왕자와 콘스탄틴 왕자가 세운 모츠메타 수도원은 쿠다이시에서 약 6Km에 위치한다. 다비드 왕자와 콘스탄틴 왕자가 아랍의 침략을 피해서 깊은 산 속에 세웠다는 수도원은 택시에서 내려 오솔길로 걸어 들어가, 세 번 아치 밑으로 고개를 숙여서 지나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아름다운 아치를 지난다. 숲 속에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주황색 보석 같다. 하지만 8세기 아랍 세력이 쳐들어 왔을 때는 사원을 휘감은 Rioni강물이 붉은 색이었다고 하니 시체들이 강에 던져졌던 참혹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바그라트 3세는 10세기에 사원을 재건하였으며 지금의 모습은 19세기에 복구된 모습이라고 한다.


모츠메타 수도원
아직도 생생한 페인팅으로 유명한 모츠매타 수도원의 벽화

Gelati Monastery


겔라티 수도원은 입구부터 엄청나게 큰 수도원의 흔적이 남아있다. 매우 귀한 녹색의 지붕은 인상적이다. 수도원은 다비드 4세(1089~1125)가 1106년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아들 테메트리우스 1세 때 완공을 했다. 이후 건물은 계속 증축되었으나 1691년에는 오스만튀르크에 의한 피해가 컸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 교회와 13세기에 세워진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와 성 니콜라스 성당이 있으며 쇼다 루스타벨리도 수학했다는 거의 외벽만 남아있는 아카데미가 있다.


많은 벽화와 모자이크 유적으로 유명한 사원에는 조지아의 왕들이 묻혀 있는데 자신의 백성들이 밟고 다닐 수 있도록 건물과 건물의 길목에 자신의 무덤을 안치한 다비드 4세의 무덤도 있다. 죽음으로 가면서도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한 지도자의 면모가 존경스럽다.

다비드 4세의 무덤 가까이에는 아들 데메트리우스 1세가 전리품으로 아제르바이잔의 도시 ‘간자’에서 가져온 철문이 있다. 아마도 데메트리 1세는 존경하는 아버지의 영전에 자랑스럽게 승리의 전리품을 바친 것이다.


녹색의 기와가 아름다운 겔라티 수도원
겔라티 수도원의 와이너리 폐허
아제르바이잔 '간자'에서 가져온 전리품 철문


'아름다운 폐허' Bagrati cathedral


교회를 보자마자 여름날 해질녘에 반짝이는 민트 색깔의 지붕에 반했다. 내부는 폐허임에도 불구하고 형형한 뼈대는 어느 곳보다도 늠름했다. Bagrationi 왕가의 시조인 바그라트 3세(975-1014)에 의해서 10세기~11세기경 우키메리오니Ukemerioni 언덕에 세워진 바그라티 성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교회였다.

17세기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파괴되기 전까지는, 당시 러시아 대사였던 Alexey Romanov에 의하면 교회는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교회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후에도 여전히 조지아의 영혼과 상징과도 같았다고 한다. 조지아의 존경하는 건축 왕 다비드 4세가 대관식을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입구와 주랑 현관에 남아있는 장식물과 십자가형의 조화로운 건물의 비례는 두말 나위 할 것 없이 조지아 중세 건축에서 가장 특별하다. 북쪽 벽에는 1003년 교회가 세워진 해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9월 들려오는 뉴스에 의하면 “IS가 팔미라 유적지에서 고대 신전인 바알 샤민신전을 폭파했다”고 했다. 이것 뿐 이겠는가. 예를 한 가지 들자면 2003년, 궁극적으로는 자국의 화폐인 달러의 침몰을 수호하기 위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행해진 이라크에서의 유적파괴와 약탈은 아무도 모른다.


2015년 현재 바그라티 교회와 겔라티 수도원 등 조지아의 중요한 기념물들도 잘못된 보존 방식 때문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명단에 오르고 있다. 그나마 팔미라나 이라크처럼 매머드급 폭력에 방치된 유적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쿠다이시를 굽어보고 있는 성당은 화려함은 사라지고 기골만 남아있는 모습이지만, 지금도 여전한 장엄함은 조지아의 정신이 되고 있다.


늦은 오후 여전히 아름다운 바그라티 성당, 쿠다이시를 굽어보고 있다.
교회의 앞모습

바자르는 쿠다이시의 옛 명성에 걸맞게 규모가 크다. 어디를 가든지 바자르는 도시의 삶을 말해주는 장소이다. 하미과, 복숭아 등 과일을 넉넉하게 사도 3 라리를 넘지 않는다. 농산물이나 식품류가 싸다는 것은 그만큼 서민들이 살기 좋다는 말과도 통한다. 과일이 비싼 한국, 그것도 서울에 살던 사람이 먹거리가 풍부하고 저렴한 곳에 가면 정말 부럽다.


바자르 옆 넓은 공원의 실한 나무들은 오래된 도시의 역사를 말해주고 펍에서 하차푸리와 함께 마신 시원한 생맥주는 쇠락한 도시 쿠다이시를 기억하게 만든다.


조지아의 가정식, 우리나라의 식탁처럼 야채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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