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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히 Feb 10. 2021

결국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혼자 일합니다만, 괜찮습니다.

결국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결국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생각지 못한 편지가 도착하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3년 전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늦게 뛰어들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가 될 때까지도 내 인생에 취업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으로 먹고사는 21세기 고흐가 될 작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학부 3학년 2학기도 아닌 졸업 직전에 말이다. 나의 졸업은 그래서 걱정과 우울함이 가득했다.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는 졸업식을 결국 다가왔고, 졸업 후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것이 두려움을 준다는 경험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두려움 속에서도 몸을 움직여야 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 백수일 수는 없었다. 느리지만 최선을 다해 취업포트폴리오를 준비했고 미술학원 선생님 , 유학미술학원, 퍼포먼스 강사, 방문미술교사, 광고회사, 아트디렉터 등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내가 하고 싶은 직업을 점점 구체화하게 되었다. 8개월쯤 시간이 지나던 어느 날 눈의 띄는 공고를 발견했고 나는 바로 지원했다. 그 결과. 나의 마지막 직업은 백수가 아닐 수 있었다.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였다. 그곳에서 나는 세트 스타일리스트로 불렸다.

세트 스타일리스트는 광고, 잡지, 영화 드라마 등 촬영 세트/소품을 제작하는 직업이다. 즉, 세트를 스타일링하는 일을 했다. 늘 정해진 캔버스 안에서 그림을 그렸던 나에게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곳은 정말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정말 놀며 일했다. 이렇게 재밌는데 돈까지 준다니! 행운이게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또래였고, 우리의 열정의 온도 또한 비슷해 늘 우리의 분위기는 식지 않고 뜨뜬했다.

일은 광고가 잡히면 그 광고 시안에 맞는 소품을 발품 팔아 협찬을 따오거나 , 제작을 했다. 세트는 대부분 자체적으로 스튜디오 안에 지었다. 그 외에도 스튜디오 관리일도 해야 했다. 보통 출근시간은 이르면 새벽 4시 보통 8시쯤 출근해 스튜디오를 세팅한다. 로케이션 (외부 ) 촬영이 아닌 회사 내 스튜디오 (다니던 회사에는 내부 스튜디오를 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촬영이 있는 경우, 겨울에는 난로를 미리 켜놓아 예열하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미리 틀어 내부를 선선하게 해 둔다. 연예인은 헤어와 메이크업을 보통은 샵에서 하지 않고 광고 촬영장에서 진행한다. 콘셉트에 맞게 컷에 따라 바꿔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촬영 전 메이크업 실을 정돈하고 스팀다리미 등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들도 세팅해 놓는다. 스텝들이 하나 둘 도착하면 나는 그들의 필요에 따라 도움을 준다.


세트 팀이라 불리는 우리는 세트와 소품을 담당하는데 촬영장 한 곳에 촬영에 필요한 소품들을 정리하고 나열하며 촬영이 시작되기까지 대기한다. 광고 세트는 로케이션 촬영 일 경우 당일 아침에 미리 가서 세트를 짓지만, 보통 스튜디오 촬영은 전날까지 모두 설치해놓는다


촬영이 시작되면 현장 모니터링을 통해 소품의 위치 또는 소품을 변경하며 촬영을 진행하고 , 촬영 보조역할을 한다. 촬영이 끝나면 이제 철수 과정이 시작된다. 설치했던 세트를 부수고 재활용할 세트와 협찬 반납해야 할 소품들은 따로 챙겨 분류한다. 분류가 끝나면 소품 창고에 다시 제자리에 두며, 버릴 것은 쓰레기장에 가져다 놓는다. 이 과정이 2줄에 정리되는 것인 참으로 놀랍다. 역시 말은 쉽고 글은 간단하다.

반복적인 일의 과정이 3년쯤 되어가자 어느 순간 행복했던 회사생활에서 불편함 생기기 시작했다.


  번째 온도가 맞던 동료들도 하나 두울 떠나간 환경의 변화가 생겼다. 선배 동료들이 모두들 떠나고 막내였던 나는 팀장이 되어있었다. 2년 동안 온기를 나눴던 동료들이 사라지고,  새로 온 직원들의 온도는 너무 차가웠다. 동료의 부재는 너무나도 나에게 치명적이었다. 지치고 힘들 때 힘이 따듯한 온기는 어디도 없었다. 나에겐 환경이 중요한 요소임을 깨달았다. 결국 나의 온도 또한 미지근해지기 시작했다.


 번째는 상사와 관계도 틀어지기 시작했다. 리더의 부재를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리더는 회피했고 , 차가운 직원들의 빈자리는 결국 나의 몫이 되었고 나의 업무는 계속 계속 늘어나고  나는 점점 그 무게에 주저앉아가고 있었다. 일으켜 줄 상사도 리더도 동료도 없었다. 그 불공평한 과정 속에서 나의 일상까지 흔들려 갔다.

<도쿄 r부동산 이렇게 일 합니다 >이라는 책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모름지기 조직이란 펼치는 사업과 일관성이 있어야 잘 굴러가는 법이니 , 결국 공정성은 모든 것에 적용되는 원칙이다”  공정성이 무너지자 회사에 대한 신용이 잃어가는 건 한 순간이었다.


세 번째는 환경이 변화자 나의 내면에도 변화가 생겼다.

 <촬영 전 -촬영 -촬영 후>의 과정이 패턴화 되기 시작했다. 촬영이 잡히면 "또 만들어야 하네 " 세트를 만들면 촬영이 시작하기도 전에 “또 다 부셔야 하네...” 라며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지겨워했다. 낯설고, 새로웠던 업무들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고 지루해졌다. 똑같은 방식의 <기획 -제작 -철수> 이 3가지는 쳇바퀴를 돌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그 안에 갇힌 다람쥐가 된 것 같았다.  광고팀에서 시안을 가져오면 우리는 시안을 그대로 재연하면 되었고, 소품도 점점 비슷한 소품을 만들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것은 없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익숙해진 순간. 쳇바퀴에 갇힌 다람쥐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놀이터는 쳇바퀴가 되었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환경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5인 이하의 회사는 직원 한 명 한 명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일당 백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모여야 , 아니 일당 백을 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는 것을.


그곳에서 점점 변해가는 나의 모습이 싫어졌다. 결국 나는 퇴사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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