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그 애랑 놀지 마 I

by 낭랑한 마들렌

어렸을 적 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렇다, 가난했다. 어린 나이에도 난 이미 그걸 알고 있었다. 가난하다는 것은 원하는 걸 가질 수 없을 때가 많다는 뜻이었고, 좋은 옷을 입기 힘들다는 것이었으며, 집이 작고 불편하다는 의미였다. 동네가 그랬고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가난하지 않은 가정도 있었다. 바로 우리 옆집에 살던 예원이네가 그랬다. 그 동네에서도 눈에 띄는 커다란 주택이었고 담벼락도 높았다. 큰 대문 안쪽에는 마당이 있었고 큰 나무들도 있어 가지들이 담을 넘어 풍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 집 딸 예원은 나랑 동갑이었고,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운영하던, 같은 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 아이와는 친하지도 않았고 한 반에 70명씩 있어도 같은 반이 된 적도 없었다. 그 애와 나는 서로에게 그저 ‘옆집 사는 아이’일 뿐이었는데, 그나마도 딱 붙어있는 집들은 아니었고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있는 관계였다. 다시 말하면 그냥 나이가 같은, 한 동네 사는 아이들이었던 거다.


나는 그 집에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다. 대문 안에라도 들어가 보고 싶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모두가 원했다. 어른들은 그 집을 다른 세계의 사람들인 양 생각하는 것 같았고, 조금 어려워하거나 껄끄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골목에서 마주쳐 어쩔 수 없이 눈인사라도 해야 할 경우에는 서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아직 만 여덟 살이 되지 않은 국민학교 2학년이었고 그 동네에 이사 온 지 2년이나 되었을까 한 때였다. 반백의 나이에도 잊히지 않는, 예원의 말 한마디를 듣게 되었다.


우리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래!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 동네 친구들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그저 골목에 나와 흙 묻히고 바닥에 주저앉으며 해 질 때까지 노는 게 일상이었다. 이 집, 저 집의 아이들이 모두 한데 어울려 놀았다. 형제끼리 서로 편들어 주기도 하고 여자와 남자로 갈라서 놀이를 하다가 패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랑 놀지 말라는 게 무슨 뜻이지?


나는 왜냐고 물었다. 그 애는 대답했다.


너네 집은 가난하잖아. 그래서 너랑 놀지 말랬어, 우리 엄마가.


아. 그 말에는 이해했다. 왠지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애의 말과 그 애 엄마의 지시를, 그리고 세상의 이치를 말이다. 여기서 '이해'라는 것은 알아들었다는 말이고 납득했다는 것이며 인지했다는 의미이지, 용납이나 수용의 뜻은 아니다. 나는 지울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나도 내 엄마에게 일렀다.


"엄마, 예원이가 그러는데, 걔네 엄마가 나랑 놀지 말랬대."

"왜?"

"우리 집이 가난하니까 같이 놀지 말랬대."

"……."



엄마는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더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토록 철없었던 나를 용서하시기를.




여름 방학이 되었고 그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당시에는 방학마다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방학 숙제'가 꽤 많았다. 방학 내내 실컷 놀고 시골집에 가서 뒹굴며 지내던 학생들은 개학 며칠 전부터 밤을 새워 밀린 독후감이나 일기를 쓰고 만들기를 하는 등 난리를 치곤 했다. 개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골목에서 놀고 있던, 가난한 집 딸이었던 나에게 그 아이가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 애는 나더러 방학 숙제를 보여 달라고 했다. 자기가 숙제를 못 했다며 내 것을 보고 베끼겠다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듣는,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심지어 처음에는 말뜻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학교 다니는 아이가 숙제를 그렇게 해서 낼 수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고지식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던 거다. 게다가 그 아이의 너무나 당당한 태도 역시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나는 고집스레 거절했다. 아이는 몇 차례 더 ‘요구’했다. 정말이지, 그렇게 경우 없고 뻔뻔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물론 이후에는 많이 보았다.


다음 날, 엄마가 은근한 말로 나를 불렀다. 그 아이에게 숙제를 좀 빌려주라는 거였다. 나는 그야말로 길길이 뛰었다. 가난한 집 딸이어서 함께 어울려 놀지도 않는데, 가난한 집 딸의 숙제를 빌려서 뭐 하냐며, 부잣집 친구한테 빌리라고 하라고 큰소리쳤다. 예원의 엄마가 우리 엄마에게 찾아와 부탁을 했다는 거다. 당신네 딸이 공부를 잘하니 그 숙제를 좀 빌려서 베꼈으면 하는데, 당신 딸이 거절을 해 예원이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며, 엄마가 잘 얘기해서 좀 빌려주게 하라고. 아마도 뻔뻔스럽게 얘기했을 것이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엄마가 한심스러웠다. 지금이야 엄마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때는 엄마가 그렇게 비굴하고 어리석게 보일 수가 없었다. 숙제는 온전히 내 것이므로 빌려주든 말든 온전히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인데, 이 모든 사정을 알면서도 엄마는 나를 구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좀 빌려줘. 한 동네 살면서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고. 네가 도와주면 이게 기회가 돼서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어렸던 나는 엄마를 이기지 못했다. 잠시 후 예원이가 집으로 찾아왔고 여전히 당당하게 공책을 ‘달라고’ 했다. 다 베낀 뒤에는 엄마들을 통해 공책을 돌려받았다. 이후에도 예원이는 나와 친구가 되기는커녕-기대도 안 했다. 아니, 내 쪽에서 친구 안 한다.- 나를 소 닭 보듯 했다. 오히려 더욱 경멸하는 것 같았다. 가난한 주제에 공부 좀 한다고 방학 숙제도 안 빌려주는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는 게 얼굴에서 읽혔다. 정말이지 진심으로, 그 아이가 어떻게 자랐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알 수 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추악하고 배은망덕해진다.



결혼을 하고 삼 남매를 낳았다. 힘겨운 육아의 터널을 지나 큰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딱 2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다시 예원이를 떠올렸다. 이번에는 내가 예원이 엄마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때 들었던 그 말을 내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던 것이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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