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그 애랑 놀지 마 II

by 낭랑한 마들렌

(1편에서 이어집니다.)





“너 그 애랑 놀지 마.”


초등학교 2학년, 내가 예원이를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때의 나이. 겨우 여덟 살인 큰아들을 앞에 두고 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었다. 너 그 애랑 놀지 마. 아무래도 그 친구는 멀리하는 게 너에게 좋겠어.


상대 아이는 1학년 때 같은 학급에 있던, 발육이 좋은 남자아이였다.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활보하며 호탕하게 인사도 잘하고 살갑게 구는 모습에 처음에는 좋은 인상을 가졌다. 아들도 그 애를 무척 좋아했고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겼다. 그러나 볼수록 아이는 지나치게 자유분방했고 아이를 훈육하는 울타리가 없거나 무시되는 듯 보였다. 거짓말을 했고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했으며 곤란할 때는 얼렁뚱땅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기도 했다. 더군다나 친구들끼리 있을 때의 모습과 어른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상당히 달랐다. 친구들을 꼬드기고 윽박지르고 험한 말을 하며 함부로 대하기도 했다. 아무리 수완이 좋아봤자 초등 2학년생이 어른의 눈을 얼마나 오래 속일 수 있었겠는가.



나는 삼 남매를 둔 전업엄마로서 매일 아이들의 등하교(원)를 직접 챙기고 오후에는 간식을 손수 만들어 먹였다. 아이들이 바깥에서 놀 수 있는 시간은 계절별로 정해져 있었고 집에서도 우리 가족만의 규칙으로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자주 우리 집에 와서 놀고 간식을 먹었다. 나중에 보니 간식 먹을 시간쯤 되면 찾아오곤 했다. 아직 부모의 세심한 보살핌과 훈육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그 아이의 부모는 나와는 다른 듯했다.


나는 내 아이가 그런 친구와 어울리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랬다, 싫었다. 내 아이의 사회적 환경은 더 나은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내가 바로 기피의 대상이었던 경험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픔이었고 쓴 맛이었다. 세상살이에 처음 눈 뜨게 되는 순간이었고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내던져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어른들이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내 아이를 그와 분리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내 아이에게도 상처가 된다는 것이다.



매일, 마음을 다잡으며 그 말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만, 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해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 우정이란 무엇인지,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은 친구가 있다면 이유가 무엇인지, 다른 친구들에게 너는 어떤 친구인 것 같은지 등. 나는 아이가 스스로 친구 관계를 생각하고 또 정리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엄마의 개입은 누구에게도 유익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가 더욱 심해진 것은 2학년이 된 후였다. 그 아이는 내 아이에게, 엄마를 졸라 특정 보드게임을 사 오라고 하는 등 아이를 불편하게 했다. 매일 종례 후에는 내 아이의 교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이를 낚아채다시피 해서 여기저기 가자고 강권하며 놀려고 했다.

결국 아들은 그 친구 때문에 좀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때였다. 내가 그 말을 해도 될 듯한 절호의 기회.



너 그 애랑 놀지 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하지 않았다. 몇 번을 삼키고 삼키며 아이가 스스로 생각해 옳은 판단을 하고 능동적으로 친구관계를 정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아이라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남의 아이도 내 아이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이 마땅한데, 함부로 상처를 입히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또한 내 아이를 보호하겠다는 의도로 어느 누군가와의 관계를 강제 차단하는 것은 분명 내 아이에게도 역시 상처가 될 것이었다. 내가 아들만 한 나이였을 때 다짐했던 것을 내가 깰 수는 없었다. 결단코 그런 엄마가 되지 않으리라, 나는 여전히 다시 다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어린아이가 과연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물리적인 힘도 아닌 심리게임에서 과연 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내심 불안했고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기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와 강제로 떼놓는 것은 내 권한 밖의 일임을 기억했다.



아이는 결국 해냈다. 정리가 필요한 관계임을 스스로 깨달았고 조금씩 그 친구와 멀어졌다. 나는 캐묻지 않았고 그저 아이를 더 관찰했으며, 기다렸다. 한 1년쯤 지나고 나니 “그 애는 좀 별로였어요.”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시간이 흐른 후 아이가 털어놓은 속내는 나의 기대를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 친구는 뭔가 불량해 보였으며, 함께 있을 때 즐겁고 편안하기보다는 불편함과 불안감까지 느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친구와 가깝게 지내는 것이 자신에게 좋지 않다는 판단을 했고, 이후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함께 놀 수가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눈치 빠른 그 아이는 다행히 오래 집착하지 않았던 듯하다.






기다림. 이것은 부모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와 뿌듯함을 안겨준 것이기도 하다. 입 다물고 그저 아이의 모습을 세심히 관찰하며 기다리니 아이는 자신의 문제를, 그것도 성인들에게도 힘든 ‘관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 것이다. ‘이게 가능하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엄마인 나였다. 아이들은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좋은지, 가까이 두고 싶은지 등은 아이들도 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 사실은 아이라서 시간이 필요하다기보다는 누구나 그렇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관계는 일보다도 훨씬 더 어렵고 곤란한 분야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 이야기를 다시 할 기회가 있었다. 아들은 그 어린 나이에 스스로 그 친구를 끊어낸 것에 대해 자신을 칭찬하며 뿌듯해했다. 너 그 애랑 놀지 마. 만일 내가 그 말을 했다면 아이의 이 뿌듯함과 자기 효능감은 없었으리라. 그제야 나는 엄마로서 고민하고 갈등했던 이 긴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 내심 놀라며 듣던 아이는 마침내 얼굴이 환해졌다.



며칠 전 가족들과 대화하던 중 이기적인 친구 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어머 어머, 친구가 어떻게 그래애?”했더니 큰아들이 아줌마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한다.



너 그 애랑 놀지 마!



그렇게, 우리 사이의 안주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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