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의 발견
토요일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온라인으로 낭독모임을 진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덥습니다. 이미 겨울이고 이른 아침의 거실은 썰렁해서 털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이제는 추운 기가 없어졌나 하고 조끼를 벗었습니다. 그런데도 덥습니다. 왜 계속 덥지, 하고 이상히 여기면서 책상 위에 있던 종이로 부채질을 합니다. 한참 모임을 진행하는데 또 덥습니다. 갑자기, 갑자기 더워요. 그냥 좀 더워지는 게 아니라 5초 만에 땀이 삐질삐질 납니다. 아, 이상하다...
이거 갱년기 증상이구나!
실은 한 3년 전부터 슬슬 갱년기의 증상들이 있어왔습니다. 갑자기 더운 것뿐만 아니라 얼굴에 홍조가 띠는 등 여러 증상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잘 대처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수많았던 불면의 밤은 삶에 대한 고뇌 때문이라 여겼고, 세계 최고의 영양제를 섭취하며 불면증은 사라졌습니다. 관절들도 삐걱대며 아프더군요. 내가 너무 혹사시켰구나, 생각하며 처방약을 먹으니 한결 좋아졌습니다. 건망증이야 아마도 사춘기 시절부터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정도로 나는 건망증 그 자체입니다. 아, 월경불순. 그건 좀 씁쓸했습니다. 여성들의 최대 고충인 월중행사를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참으로 상쾌한 일이지만, 그것 자체로 내가 늙고 낡았다는 느낌이 드니 변덕이 생기더군요. '불편하고 힘들고 아파도 괜찮아, 그냥 조금 더 월경을 하는 게 낫겠어...' 몸이 안 좋아 침을 맞을 때면 닫히던 월경도 다시 열리곤 했습니다. 용한 분을 알고 있거든요. 어쨌든 그 모든 증상들이 심각하지 않았고 나 역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보다, 했더니 그냥 지나가데요.
그런데 그 아침, 경험자들이 가장 대표적인 증상으로 꼽는 급성 발한을 체험하자 더는 부인할 수도, 미룰 수도 없이 갱년기증후군 환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고약한 기분이더군요. 그러고 보니 최근 나의 상태가 모두 이해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아무것도 하기 싫었는지, 왜 그리 자꾸 눕고 싶었는지, 해야 할 일도 가급적 안 하려고 뺀질거리고 기분은 왜 늘 가라앉는지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갱년기증후군의 초기 증상이었던 거죠. 그리고 급기야 심한 감정 기복까지 생겼습니다.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울컥해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기함할 일을 경험합니다. 아아, 난 이제 50인데 갱년기라니, 인간의 삶은 정녕 이러한 것인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것은 꽤나 충격적이었답니다. 애가 셋이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법인데, 웬만해선 당황하지 않는 나도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소연할 데가 없더군요. 이해해 줄 사람도 없지만은 이런 걸 드러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떠오른 것은 40년도 넘은 동갑내기 친구들이었습니다. 괜히 칭얼거려 봅니다. “나 갱년기인가 봐... 어떡해.. 나 괜찮겠지?” 친구들 중 이미 여럿이 선배였습니다. 그들은 나를 위로했고 호르몬제 복용이라는 적극적인 해법도 제시해 주었습니다. 역시 친구들뿐이군.
가족들이여, 떨지어다!
엄마몬의 갱년기가 시작되었다!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한 이 말은 무슨 선전포고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급히 적막이 공간을 감싸며 가족들의 눈알 굴리는 소리만이 감지되었습니다. 옳지, 제대로 긴장들 하시오!
그 뒤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겼을 때 "나 갱년긴데." 하면 가족들은 "아, 예." 하며 슬그머니 피하곤 하는 것입니다. 나쁘지 않군.
나는 약을 먹기는 싫습니다. 현대의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편은 아니어서 가벼운 문제는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과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갱년기증후군도 ‘가벼운 문제’에 속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직은 의학에 의존하고 싶지 않네요.
때는 가을이었고, 낭독수업 중 어느 수강생분이 낭송해 주신 좋은 시가 떠올랐습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데, 몸도 낡아질 수 있지. 하지만 마음과 정신만은 낡아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육신은 나를 감싸고 있는 옷일 뿐, 나의 내면은 깊고 넓게 익어가는 것을 선택하겠습니다.
아, 갑자기 또 덥네요. 땀이 나나요... 괜찮습니다, 그저 익어가는 느낌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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