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유명한 저서 [인생 수업]을 읽었습니다.
아래 문장을 발견하곤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요즘 아니, 한참 전부터 내가 간절히 원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실행하지 못했던 것.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면 나는 가장 먼저 이것을 하고 싶습니다. 의외로 별것 아닌데요, 바로 ‘침대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혼자여야 하는데요,
자고 싶을 때 원하는 만큼 자고, 아무 때나 일어나 그 순간 먹고 싶은 걸 원하는 만큼 먹는 겁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동안에는 딱 두 가지만 할 겁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우선순위에 밀려나 있던 소설 읽기를 몰아서 하고요, 혼자서 낭독도 하며 재미있게 놀겠지요. 그리고 달달한 로맨스 영화를 보는 겁니다. 혹은 나쁜 놈들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이며 복수하는 청량한 영화도 좋겠습니다.
이 모든 걸 침대에서만 하는 거죠.
침대 밖은 위험하니까요. 이런 생활을 최소 이 주쯤 하고 싶습니다. 일주일은 쏜살같이 지나갈 것이고, 한 달이라고 말하기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장담컨대 이 주가 되기 전까지는 이 생활이 결코 지겨워지지 않을 겁니다.
제법 의미심장해 보이는 질문에 대한 답이 좀 싱겁습니다.
이 대단치 않은 것을 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야만’ 할 수 있는 걸까요? 이토록 게으른 생활을 남에게 보이기가 멋쩍기 때문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주씩이나 침대에서만 뒹굴고 싶은 건데. 그 모습을 누가 보면 흉보지 않겠습니까.
이쯤에서 저자의 질문 의도가 드러날 수밖에요.
바로 ‘지금 당장’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우리는 원하는 것을 실행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실행하지 ‘못’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우리는 능동적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실행할 수 없다고 오해하는 그 이유들을 따져 보면 ‘근거 없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용기를 내는 일인 듯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누군가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날 흉볼 것 같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침대에서 뒹굴기만 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챙겨야 할 가족이 있고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어찌 한가하게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있을 수 있나요. 맘 같아선 가족들을 모두 내쫓고 혹은 그들을 버리고 어딘가로 가서, 모든 일을 손에서 내려놓고 실행하고 싶긴 합니다. 나는 본래 이토록 게으른 사람입니다.
당신은 어떠신가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