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 김지하 '무화과'

by 후시딘

그라함, 이라고 순주는 다시 한번 작게 중얼거렸다.

쉰 여섯해를 살며 처음 와보는 서교동 거리엔 식당과 상점이 가득했다. 합정역 출구를 나와 지도가 가리키는 식당에 오기까지 전 세계의 대표 음식점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시카고피자부터 쌀국수, 초밥은 물론, 타파스, 파스타와 사천요리, 브레첸, 케밥... 현란한 간판과 냄새가 눈과 코를 어지럽혔다. 화려한 간판들 사이에서 정작 약속장소인 그라함은 눈에 띄지 않았다. 스마트폰의 지도앱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정확히 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거리와 지도의 간극은 넓고 낯설었다.


“어디쯤이야? 미용실과 편의점 사잇길, 바로 뒤인데”

전화기에서 들리는 미경의 목소리가 아득하다고 생각했다. 미용실, 편의점, 그 옆의 또 편의점... 동네에서 이렇게 멀리 나온 건 오랜만이었다. 골목마다 프렌차이즈 편의점과 스타벅스가 있다. 그들을 이정표로 길을 찾는 건 안될 일이라고 순주는 고개를 저었다. 한참을 헤맨 끝에 큰 길에 있는 간판을 발견하고 그녀는 힘이 빠졌다. 이미 한번 지나친 골목이었다. 잘 보이지도 않는 스마트폰의 작은 지도에 집중하느라 막상 눈앞에 있는 약속장소를 놓친 것이다. 이런 소소한 일에 좌절하는 건 이미 익숙했다. 인지 능력의 저하는 일상의 실망과 슬픔도 무디게 만들어주는 모양이라고 순주는 생각했다. 모든 일에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층 구석의 룸에서 미경은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거의 은발이 된 숱 많은 컷트머리가 역광을 이고 은회색으로 빛났다. 비둘기, 라고 순주는 생각했다. 디자인을 전공한 미경은 처음 입사한 전자회사에 임원까지 올라갔다. 그녀가 디자인한 백색가전은 신혼살림에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제품들은 단란한 가족의 상징이 되었다. 미경은 결혼하지 않고 더 많은 히트 상품을 디자인했다.


순주의 주방에 놓인 커다란 냉장고도 미경이 디자인한 것이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그녀는 가끔씩 미경을 떠올렸다. 투명한 얼음과 반짝이는 LED 계기판을 보며 친구의 빛나는 일상을 상상했다. 그 빛 아래에서 김치통을 꺼내고 찬밥을 꺼내는 자신의 모습이 채소칸에서 물러버린 상추 같다고 생각했다. 존재감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본래의 모습을 잃고 폐기할 날만 기다리고 웅크린 상추들. 무른 채소를 버릴 땐 물이 뚝뚝 떨어졌다. 슬픔은 간데없고 고약한 악취만이 주방을 채우곤 했다.


정확히 3년만이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동창회에서 마지막으로 미경을 보았었다. 여고시절 앞뒤 번호로 친하게 지냈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같은 여대에 다녔다. 나트막한 오래된 주택가가 즐비했던 학교 근처에서 둘은 떡볶이와 빙수를 먹으며 학교 옆 미군부대의 철책길을 자주 산책했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분명한 건 반짝거리던 그 시절에 훗날 상상한 둘의 마주침이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코스 먹자. 여기 런치가 괜찮아.”

순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3년전 결혼한 큰아들과 작년에 독립한 둘째의 안부를 물으며 미경은 환하게 웃었다. 퇴직한 남편은 고향인 정읍에서 농장을 하며 일주일에 한두번 서울에 올라왔다. 순주는 아직 준비가 안되었다는 이유로 정읍행을 미루고 있었지만 사실 연고도 없는 낯선 그곳에 산다는 일이 내키지 않았다. 따끈한 식전빵에 버터를 바르고, 생굴에 레몬즙을 뿌린 전체요리를 먹으며 순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그래, 하염없이 주절거렸다. 얼마 전 시사지에 실린 대기업 여성 임원이 된 미경의 인터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잘나가는 커리어, 잘나가는 사회인으로 이미 순주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나고 싶다는 미경의 전화를 받았을 때 사실 의아했다. 졸업 후 바로 결혼해서 전업주부가 된 평범한, 어쩌면 평범 그 이하가 된 자신을 왜 보고 싶어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단조로운 일상의 이야기는 곧 바닥을 드러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을 때 메인 요리인 등심 스테이크가 그들 앞에 놓였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기를 썰던 미경은 나이프를 내려놓고 순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네. 건강은 좋지? 고기 잘 먹을 수 있지?”

침묵이 불편한 모양이라고, 순주는 생각했다. 함박 웃음을 터뜨리며 미경을 바라보았다.

“입맛이 좋아 살만찐다. 배나온거 봐라. 비만도 불치병이라는데. 넌 어때?”

미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응, 난 췌장암이래. 그게 치료가 쉽지 않은 모양이더라.”

고기를 씹느라 분주했던 순주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속에 너무 큰 살점을 우겨넣었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넘기기엔 아직 씹지 않은 덩어리였다. 막막했다. 고기점을 씹는 일이, 미경에게 할 말이, 그 모든 것이 아득하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먹어. 우리가 이 식사를 못한다고 내가 낫는 것도 아니잖냐. 그치?”

다시 고기를 썰던 미경은 잠시 헛기침을 하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네 생각이 나더라.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병원이 아니고 밖에서 보고 싶더라.”

이 순간에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울어야 할지, 지금처럼 웃고 떠들어야 할지 순주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입속의 고기점을 꿀꺽 삼켰다. 다행히 걸리지 않고 넘어갔다. 무슨 말이든, 몇시간 같은 이 침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이럴 땐 진심을 이야기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난 니가 늘 부러웠어. 결혼을 하지 않은 것도,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는 것도, 훌륭한 디자인을 하고 잡지와 신문에도 자주나오고, 또 일로 너무 바쁜 것도. 모두들 너를 알고 지내고 싶어하지. 니가 내 동창이라고 하면 누구나 감탄사를 내뱉어. 근데 어느 순간 그게 싫은 거야. 티비에 나오는 니 모습을 보며 남편에게 내 친구라고 이야기하려다 입을 다물었어. 내가 너무 초라하니까, 난 한번도 꽃을 피우거나 결실을 가져보지 못했으니까.

순주의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다시 미경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런 내 앞에서 오랜만에 연락한 네가 암이라고 하면, 그래, 만약 정말 심각한 상태라고 한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니?”


부드럽게 미소 짓는 미경의 앞에서 순주는 말없이 눈물을 찍어냈다. 저쪽에서 머뭇대던 웨이터가 접시를 쳐다보자 미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빈테이블을 응시하던 미경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도 늘 네가 부러웠어. 가족,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보석을 넌 늘 옆에 두고 살았잖아.”

조용히 다가온 웨이터가 테이블을 정리한 후 작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동그랗게 잘 구워진 타르트 위엔 통통하고 윤이 나는 무화과가 듬뿍 얹어져 있었다. 한눈에도 정성들여 구운 무화과 타르트였다. 미경은 포크를 들어 타르트 지의 모서리를 꾹 눌렀다. 무화과 콩포트가 섞인 노란 커스터드 크림이 단면을 드러냈다. 포크를 내려놓은 미경은 순주를 쳐다보며 눈가 주름이 자글하게 접히도록 활짝 웃었다.


“무화과는 그냥 이 자체가 꽃이고 열매야. 열매 안에서 꽃을 피우고 수정하고 열매를 맺어. 너는 무화과같은 사람인거야. 한 번도 꽃이 아닌 적이 없었고, 열매가 아닌 적이 없었어. 순하고 여린 초록 꽃받침의 응원 속에서 네 모든 순간은 꽃이고 열매였어. 나는 그걸 알아.”







무화과


김지하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게 꽃 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 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 꽃 피는 게

그게 무화가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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