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마지막 날이었다. 갤러리에 들어서며 관수는 다시한번 카탈록에 찍힌 미경의 이름을 눈에 새겼다. 아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취미활동을 할 줄은 몰랐다. 물론 사진찍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긴 했다. 과학수사국 수사계 경위인 아내에게 사진작업은 곧 업무를 의미했다. 업무의 연장인 취미라니, 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범죄사진은 아니겠지?”
“빙고! 아주 생생하고 살의를 풍기는 현장사진이지.”
미경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경찰청 관계자들이나 변호사가 필요한 사람들이 좀 오려나. 그런 그의 표정을 보았는지 아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당신일엔 별 도움이 안될거야. 초대장은 회사사람들이랑 당신 친구들, 가족, 정말 지인들 중심으로 돌렸거든. 오픈이랑 파이널파티에 올거지?”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러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자기 일인데. 모두 대단하다고 생각할거야. 경찰공무원이 좀 바쁜가. 그와중에 취미 생활도 프로페셔널하게 하고.”
관수는 커피를 따르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경직된 아내의 몸이 느껴졌다. 손을 떼고 커피잔을 들었다.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이 느껴졌다. 날카롭다고 생각했지만 경찰로서 아내의 눈빛은 날까롭고 예리한 면이 있었다.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는 미경을 안았다. 말랑하고 작은 몸이 품에 쏙 들어왔다. 아내의 손이 그의 등을 감았다. 가늘고 미끄럽게 스치는 두 팔이 뱀처럼 스르륵 그의 등을 스치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참 온기가 부족한 여자였다.
전시회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사진들은 흑백과 컬러가 섞인 추상 작품들이었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지도의 등고선처럼 이어지다 끊어진 선과 점은 동양화의 붓자국처럼 보이기도 했다. 컬러로 작품에는 그래픽과 드로잉을 넣었는데 아마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되었다. 역시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모양이라고 관수는 혀를 끌끌 찼다.
전시 첫날 갤러리에 왔지만 사람이 많아 그림을 잘 보지 못했다. 아니,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과 신경은 오로지 진아, 온통 오진아 경감에게 향해 있었다. 자문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소개 받던 그때부터 진아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직 자신에게 이성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감각할 여력이 남아 있다는 것이 경이로왔다. 사랑은, 기적이고 최고의 선물이라는 식상한 말을 그는 오진아를 보며 깊이 공감했다.
“오늘은 작가 도슨트를 진행 할 겁니다. 오신 분들 거의 지인들이니까요. 친구에게 작품을 설명한다는 느낌으로 함께 해 주세요. 자, 사진들의 정체, 궁금하셨죠?”
“그래픽 작업이 아니었나요?”
팜플렛을 열심히 들여다보던 중완일보의 윤기자가 질문했다. 이번 사진전은 미경의 직업과 연결된 특이한 미감으로 핫한 전시로 떠올랐다. 인기 유튜버인 윤기자의 소개를 시작으로 SNS의 인증 몰이가 이어졌다. 밝혀지지 않은 사진의 표현기법과 주제의 미스테리도 보는 재미 중 하나로 꼽혔다. 갖은 추측이 줄을 이었다. 거듭된 전시연장을 아내는 완강히 거절했다. 오늘은 그간 인터뷰와 SNS에서 밝힌대로 전시에 대한 모든 것,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작품 ‘it's Showtime'의 공개가 있는 날이었다.
“저만 이야기하면 재미없죠? 무엇이 연상되는지,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 듣고 싶어요.”
사람들은 지도, 섬, 먼지, 혹은 궤도나 동심원 등을 외쳤다. 누군가는 거의 원형인 이 그래픽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범죄나 인간의 악마성을 표현한게 아니냐는, 작가의 직업을 고려한 맥락있는 답변도 이어졌다. 관수는 열 다섯점의 프린팅을 천천히 감상했다. 13인치 노트북만한 것부터 전지만한 크기까지 점점 커지는 작품은 ‘곡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첫 번째 작품은 지도의 등고선처럼 원형이 얽혀 있었다. 점묘를 한듯한 곡선으로 가득 차 있는 , 마치 혼동을 표현한 듯한 작품도 있었다. 원형을 그리는 곡면 두 개가 겹치고 무지개빛 조명이 투영된 컬러풀한 작품도 이목을 집중시켰다. 증거, 무엇의 증거일까. 삶의 증거라는 의미일까? 그가 작품을 성글게 들여다 보고 있을때 오진아 경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성미경 작가님의 직장동료이자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전시회 제목이 ‘텀블러, 증거’ 잖아요. 경찰로서 사건 해결에 실마리가 되는 증거는 ‘점’, 혹은 ‘섬’으로 존재하기도 하죠. 너무 직업을 염두하고 생각하는 것도 또 창작자에겐 실례겠죠? 작품을 존재로 확대하면 서로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 고립, 평행한 곡선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겠고요."
오, 진아 제법인데. 무슨 소리인지 이해는 잘 되지 않았다. 분명 멋진 말이었을 것이다. 관수는 벌어지는 입을 막지 못하고 돌아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진지하게 듣던 미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프렉탈 이론을 아시는지요. 작품을 구상하며 프렉탈을 떠올렸습니다.”
프렉탈이라, 일부를 확대했을 때 전체 모습이 똑같이 반복된다는 그런 내용아닌가. 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팔짱을 꼈다. 그나저나 아내가 그런 분야에 관심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증거의 아주 일부입니다. 지문이죠.”
탄성이 흘러나왔다. 작품은 채취한 지문들을 그래픽으로 옮겨 다양한 배율로 확대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수런거리며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엄지손가락을 들어 동심원의 지문을 뚫어지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관수도 입을 딱 벌렸다. 기발한 작품이었다. 지문의 프린팅이 작품이 될 수 있다니.
“설마, 진짜 범죄 증거들은 아니겠죠?”
윤 기자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미경은 알듯말듯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올렸다.
“뭐, 아직은 아니지만 가능성은 누구나 갖고 있는 거니까요.”
미경은 작품들을 하나씩 스쳐 사람들은 회색 암막커튼이 드리워진 갤러리 속 작은 공간 앞에 섰다.
알파벳 하나하나가 알록달록한 사탕빛으로, 유치하게 오려져 붙어있었다. 영상 설치물이라는 작품은 남편인 관수조차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보다 특수한 기법을 사용한 작품일거라고 생각했다.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최대한 대단하다는 표정을 짓고 윙크한 후, 살짝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아내는 표정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커튼 앞으로 다가왔다.
“자, 이제 프렉탈 이론을 확인할 때가 왔습니다. 점과 섬들을 비춘 카메라를 뒤로 훅 당겨서 우리는 전체를 보기로 합니다.”
커튼을 열자 어둠이 들어찬 검은 공간에 걸린 흰 스크린이 보였다. 화면에 영상이 뜨기 전, 오디오에선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시작되었다. 관수는 홀린기분으로 그 소리를 들었다. 그곳은, 그 소리는 매우 낯익었다. 조악한 카메라 영상이 스크린을 채웠다. 벤티 사이즈의 스텐 텀블러와 와인잔이 어지럽게 놓인 테이블이 있는 거실.
그곳은, 관수와 미경이 사는 집이었다. 그의 눈앞이 하얘졌다. 장면이 바뀌어 텀블러를 집는 남녀의 손이 교차 편집되었다. 조악해서 더 생생한 대화들이 이어졌다. 야, 그거 입지 말라니까... 왜? 미경이 생각나잖아. 늘어난 면빤스. 야, 이거 그런거 아니야, 그리고 와이프 속옷 좀 사줘. 뒷담화 하지 말고.
관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휘청거렸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화면가득 두 남녀의 지문이 어지럽게 찍힌 텀블러가 클로즈업되었다. 천천히 다가간 카메라는 노란 할로겐 조명을 받아 둔탁하게 반짝이는 텀블러만을 잡았다. 신음소리와 함부로 웃는 톤 높은 여자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삶의 증거처럼 스텐 텀블러에 엉긴 지문자국이 그물처럼 정적을 흡수해 버린 듯 정적이 깨지고
이윽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