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본자의 방송 사고

여전히 카메라와는 친해지기 힘들어

by 마이즈

지난 주말, 강남의 어느 지하 스튜디오. 무대에는 교수님 한 분, 대표님 한 분, 그리고 나까지 셋이 서 있었다. 스튜디오 후면에 연결된 대형 패널에는 ZOOM으로 접속 중인 50여 명의 학생들의 얼굴이 보였다. 생방송? 라이브를 한다고요?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황했다. 계약으로는 영상 촬영만 8주 아니었나요? 죄송하지만 내부 문제로 마지막 8주 차는 라이브로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7주 차 촬영까지 마친 상황. 중도 하차는 싫었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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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당일, 메이크 업을 마친 후 리허설을 진행했다. 그 와중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준비해 간 자료를 사용하지 않기로 변경한 것이다. 자잘하게 수정된 부분들은 작가님이 프롬프트로 띄워 주시기로 했다. 그리고 라이브 시작! 초반은 매끄럽게 잘 진행이 되었는데, 리허설 중 교체한 구간에서 문제가 생겼다. 자료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을 송출 담당자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혼동하지 않도록 자료를 아예 폴더에서 삭제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프롬프트에는 ‘자료 올려 주시면 다음 이어서 진행. 잠시 대기’라는 이전 메시지가 떠 있었다. 수정된 프롬프트가 아닌 것이다. 자료를 띄워야 하는데 자료가 없다? 일부는 자료를 찾느라, 일부는 왜 안 넘어가나 기술적인 문제인가 싶어 우왕좌왕했다. 5분 전 리허설에 급히 교체한 탓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서 일단 애드리브를 쳤다. 어… 잠시만요… 이 부분은 너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서요, 뭐부터 말씀드리면 좋을까… 촬영팀은 여전히 정신이 없어 보였다. 막막한 상황에서 나의 애드리브는 점점 길어져 갔다. 제발! 제발! 눈치채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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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올레 TV OOO작가입니다!]


방송 섭외 메일을 받았다. 왜 나 같은 사람을?이라고 생각했는데, 내용을 보고 납득했다. ‘파본자들’이라는 VOD 설명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애니메이션을 소개해줄 오타쿠를 찾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했다. 딱히 촬영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2년 넘게 방송국 생활을 하기도 했고, 최근에도 다큐멘터리에 인터뷰 영상을 1시간가량 촬영하기도 했으니까.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 다만 다른 걱정이 있었다. 방송에 나가면 옛 동료들이 악플을 달거나 공격하지는 않을까? 혹시 또 마녀 사냥 당하는 것은 아닐까? (아홉 번의 실수) 하지만 평생 이렇게 숨어 살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1회성 출연이니 테스트 겸 나가도 좋을 것 같았다. 작가님에게 악플 등이 염려된다고 메일을 보냈는데, 오히려 안심시켜 주셨다. 너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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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작품이었다. 주제가 ‘런 웨이에서 웃어줘’라는 패션 소재의 애니메이션이었다. 좋은 작품이었기 때문에 욕심이 났지만, 작가님에게 솔직한 답장을 보냈다. 이 작품은 패션 계열 종사하신 분들이 리뷰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제가 나가면 오히려 전문성이 떨어져서 아쉬울 것 같습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괜찮으시면 제가 패션 쪽 일을 하는 오타쿠를 같이 찾아봐 드릴까요? 작가님은 정중히 거절하셨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의 리뷰는 다른 분이 하게 되셨는데, 이후 서로의 블로그를 왕래하고 SNS도 팔로우하는 사이가 되었다.

reonweieseo-useojweo.jpg?type=w580 런 웨이에서 웃어줘

여기서 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님이 다시 연락을 주셨다. 올레 TV에서 서비스하는 애니메이션 중 아직 다루지 않은 작품 리스트가 함께였다. 그래도 한번 꼭 같이 하고 싶은데, 그럼 직접 소개하시기 좋은 작품을 선정해서 알려주세요. 너무 감사한 제안에 리스트에서 한 작품을 선택했다. ‘나만이 없는 거리’였다. 작품을 선택하자 사회자의 질문 리스트가 도착했고, 자료 화면으로 사용할 주요 장면들에 대한 가이드도 부탁받았다. 이 질문 그대로 하시는 건가요? 그냥 답변 쓰고 외우면 될까요? 기본은 그 순서인데 살짝 달라질 수 있으니 외우시기보다는 편하게 답변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차라리 달달 외우는 게 속 편하겠는데…

5352_webmain.jpg?type=w580 나만이 없는 거리

촬영 당일, PD님과 인사를 나누었고 작가님도 직접 만나 뵐 수 있었다. PD님은 작품 선정이 너무 좋다고 해주셨다. 한 편만 보고 자려고 했는데, 밤새 다 볼 수밖에 없었어요. 작가님도 촬영 감독님도 그 말에 동의했다. 내 작품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메이크업을 하고 대본을 받았다. 말하다가 막히실 때 살짝 보세요. 많이 긴장하셨어요? 걱정 마세요. 얼마 전에 다큐멘터리 인터뷰도 1시간 넘게 했는걸요. 하지만 이 자신감은 촬영장에 들어서는 순간 와장창 깨졌다. 촬영 스태프들이 너무 많았고 내 옆 자리에 김민아 님이 앉아 계셨다. 연예인에 대한 환상은 없었지만, 이 긴장되는 상황에 익숙하신 모습이 멋져 보였다. 촬영은 정신없이 진행되었다. 엉망진창으로 한 것 같았는데, 두 번 만에 마무리했고, 피디님 말로는 처음인데 꽤 잘한 거라고 해주셨다. 위로받는 느낌이었지만, 여전히 자괴감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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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방송일. TV에서 보는 내 모습이 왜 이리 어색한지. 오글거렸다. 한동안 연락 안 하던 지인들에게서 카톡이 왔다. 방송 데뷔하는 거야? 아니, 한 번만 하는 거야.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이 방송이 1주일간 계속 나온다는 점이었고, 올레 TV를 사용한다면 처음 전원을 켰을 때 무조건 기본으로 설정되는 채널이라는 점이었다.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두 번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너무 힘들었던 경험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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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몇 달 후. 작가님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블로그 보니까 드라마도 많이 보시던데, 이번에는 해외 드라마 중에 한편 하면 어떨까요? 머릿속에서 하지 말라는 목소리와 함께 지난번 실수를 만회하자는 목소리가 들렸다. 첫 방송 때 우려했던 악플이나 마녀 사냥은 없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고민하며 ‘파본자들’에 출연한 분들을 검색해서 블로그와 SNS를 둘러보았다. 그 과정에서 결심을 굳혔다.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기회인데, 나에게 두 번이나 온 거잖아? 이걸 그냥 보내면 후회할지도 몰라! 작가님이 보내주신 리스트 중에서 가장 오타쿠스러운 것으로 골랐다. ‘미나미 군의 연인’이었다.

resource.png?type=w580 미나미 군의 연인

지난번에는 너무 긴장해서 대본을 거의 암기하다시피 뚝딱이며 말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번에는 긴장하지 않기 위해서 대본을 아예 읽지 않았다. 적당한 포인트 단어만 기억하고 흐름에 따라 말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두 번째 촬영일. 그래도 한번 본 사람들이라고 훨씬 마음이 편안했다. 그래. 이렇게 편안하게 하는 것이 맞는 거겠지! 이번에는 괜히 더 오버해서 김민아 님과 장난도 쳤다. 하지만 큐!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역시 프로다. 문제는 나였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당황해 버린 것이다. 유일하게 계속 미소를 띤 것은 김민아 님이셨는데, 조금 전까지 장난치던 미소가 아닌 방송용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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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긴장한 것 같아 보였는지 김민아 님이 장난을 걸었다. 미나미 군의 연인은 손가락 크기로 작아져 버린 소꿉친구를 미나미 군이 보호하며 사랑이 싹트는 이야기인데, 내가 입은 옷 앞 주머니를 보며 여자애가 들어있는 것 아니냐며 농담을 하셨다. 애드리브에는 애드리브로 대응해야지! 어… 음… 이… 인형이라도 꽂아 둘 걸 그랬네요! 저는 오타쿠... 니까요... 컷! 아... 부끄러웠다. 멘트가 이게 뭐냐. 결국 첫 번째보다 더 엉망진창으로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김민아 님의 리드 덕분이었다. 역시 프로는 달라. 방송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아무리 엉망이라도 이 분들이라면 편집을 잘해주실 거라는 점이었다. 나의 실수를 남에게 떠넘기다니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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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도 똑같은 채널에서 똑 같이 일주일간 송출되었다. 지난번보다 더 민망해서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계속 대본만 뒤적거리는 모습이 찍혔고, 민아 님의 애드리브에도 어설프게 대응했다. 진짜, 다시는 방송하지 말아야지. 주변에서는 두 편 째라며 고정 출연 가는 거냐고 농담을 했는데, 그럴 리가. 이후 파본자들은 프로그램 종료가 되었다. 어쩐지 내가 망친 탓도 있는 것 같다. 그럴 리 없겠지만.

%ED%99%94%EB%A9%B4_%EC%BA%A1%EC%B2%98_2021-12-02_223554.jpg?type=w580 원격 영상 진로 멘토링

다시는 방송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를 붙잡은 것은 어느 PD분의 절절한 메일이었다. 도시가 아닌 농ㅈ어촌, 산간 지역의 학생들은 직업이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학습할 기회가 없습니다. 교육에서 소외된 지역 아이들을 위한 라이브 영상 촬영 부탁드립니다. 이를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시작하다 보니 ‘파본자들’ 이후부터 꾸준히 촬영과 방송을 진행했다. 급기야 이번에 K-MOOC에 올라갈 강좌 영상 촬영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ED%99%94%EB%A9%B4_%EC%BA%A1%EC%B2%98_2025-07-09_110425.png?type=w580 k-mooc 강좌

한동안 당황할 일이 없었는데, 나에게는 첫 방송 사고였다. 여전히 애드리브를 치며 시간을 끌었고 촬영팀은 우왕좌왕했다. 그때 구세주 같은 음성이 들렸다. 제 생각에는 말이지요! 이번 촬영을 나에게 부탁했던 디지털 미디어 전공 교수님 이셨다. 카메라는 교수님을 비췄다. 이틈이었다. 빠르게 작가님에게 손짓을 했다. 교수님이 시간을 끌어준 사이 상황은 정리되고 후반부 방송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덕분에 준비한 영상 피드백 하나는 못썼지만, 이 정도면 선방했다. 한동안 촬영과 라이브를 많이 해왔기에 이제는 카메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방송 사고를 당해보고 깨달았다. 난 아직 멀었다는 것을. 역시 방송은 내 체질에는 안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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