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해피 트리

잃어버린 생애 첫 자가 아파트

by 마이즈

내가 태어난 집은 청담동에 있는 아파트였다. 5살 무렵에 첫 이사를 했다. 서교동에 있는 큰 집이었다. (맨션 오브 서교) 가정부 누나는 자기 방이 생겼고, 기사 아저씨와 주방 아주머니도 머물렀다. 2층 빈 방 하나는 근처 대학생들에게 세를 내주었다. 이곳에서 TV 유치원도 다니고 모델이나 합창단 활동도 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 초등학교에 저학년까지 머문 이곳은 추억마저도 너무나 완벽한 공간이었다. 아버지 사업은 날이 갈수록 잘되었고 88 올림픽이 끝난 뒤 선수촌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파트임에도 복층 구조였고 심지어 작은 정원도 있었다. 나에게 집은 항상 이렇게 커다란 공간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이 넓은 공간 여기저기에 빨간딱지가 붙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한순간에 고꾸라 졌고 우리 가족은 집을 잃었다. 처음으로 서울을 떠나 안양으로 이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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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머물게 된 집은 외 할아버지의 별장으로 사용하던 작은 평수의 아파트였다. 아버지는 더 이상 함께 살지 않았다. 대신 빚이 생겼고,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내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안양에서 보냈다. 한때는 학폭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엇나가며 폭력 서클에 들어가기도 했다. (학폭 탈출) 하지만 완전히 틀어지지는 않고 결국 제 자리를 찾았다. 헌 책방의 할아버지와 으뜸의 사장님, 두 분의 아버지 같은 존재 덕이었다. (아버지 부자) 외 할아버지가 안양 별장을 처분해야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며 우리는 이번에는 경북 구미로 내려가야 했다. 할아버지 공장에 있는 직원 사택을 내어준 것이다. 침대 하나와 옷장, TV가 들어가고 나니 간신히 나와 동생이 누울 만한 공간이 나왔다. 이 작은 방에서 우리 세 가족이 복작거리며 살았다. 식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사택으로 가서 했다. 공간은 좁아졌지만, 어머니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어머니라는 업)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집의 크기가 행복과 정 비례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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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0대 시절 내내 거주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없었다. 최소한 월세를 걱정할 일은 없었으니까. 기껏해야 가스비와 전기세 정도만 신경 쓰면 충분했다. 대학에서는 랩실이나 동아리 방에 숨어 살기도 했고 기숙사 생활도 했지만, 언제든 구미에 내려가면 어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우리 집이 있었다. (평화로운 대학생활) 어른들의 보호를 받으며 20대가 되었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치는 부모도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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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취업하고 나서 한동안 영등포 시장에 있는 고시원에서 생활을 했다. 어차피 거의 철야였으니 작은 공간이라도 상관없었다. 여기에서 돈을 모아 보증금을 마련한 뒤 잠실 새내 역에 있는 작은 원룸으로 옮겼다. 잠자다가 도둑을 만났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못생겨도 괜찮아) 주변에 번화가가 있어 새벽 아르바이트를 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설거지 머신의 꿈) 꾸준히 돈을 모아 근처에 있는 조금 더 큰 빌라로 이사했다. 방 3개에 거실 겸 주방이 딸린 곳이었다. 당연히 월세였는데, 가족 생활비까지 내려면 알바 하나 정도를 더 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이곳에 살며 여러 회사를 다녔고 동생을 일본에 유학 보냈다. 우리 가족에게 많은 일들을 벌어진 장소였다. 이후 대기업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퇴근 시각이 새벽 3~4시가 되니 교통편이 끊겼다. (정사원의 조건) 이래서는 택시비가 더 나온다. 매번 청구하기도 눈치 보이고... 결국, 회사 근처인 선정릉 역으로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모은 돈을 보증금으로 쏟아부었다. 여전히 월세였지만 어머니는 만족했다. 만나는 친구들이 달라졌고 연예인의 어머니들과 친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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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을 퇴사하며 일본 취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성에 있는 공장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멈춰버린 게임 라이프) 한동안 주말마다 강남과 화성을 오갔지만, 도저히 다닐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직장 때문에 이사를 가야 했는데, 어머니는 도시가 아니면 안 된다고 버티셨다. 결국 수원 외곽에 있는 화성시 기안동으로 합의했다. 서울과 회사의 중간 위치였다. 집을 알아보던 중, 지금 가진 보증금에 그동안 모은 돈을 넣으면 30평대 아파트를 살 수 있음을 알았다. 물론 약간의 대출이 필요했지만, 신용 등급이 높은 아버지 회사에 재직 중이었고 10년 이상 직장 생활을 해왔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대출 이자는 그동안 내던 월세보다 적었다. 그렇게 나의 첫 자가 아파트가 생겼다. 이름도 참 예뻤다. 해피트리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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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집 꾸미기에 진심이셨다. 이제 우리 집이니까. 남의 눈치 안 봐도 되잖아? 서울에서 먼 게 아쉽지만 적응하고 사는 수밖에. 이 집에 살면서 더 잘될 일만 있을 거야. 곧 회사도 물려받을 거고. 아쉬운 것은 나 혼자 뿐이었다. 내 집인데, 왜 나만 불만족스러운가. 여전히 출퇴근 거리가 멀었기에 주말에만 집에 왔고 보통은 회사 기숙사에서 머물렀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이 지났다. 동생이 결혼할 상대를 데리고 한국에 들어왔다. 미래에 며느리와 처제가 될 K상은 우리 가족과 해피 트리에서 첫 대면을 했다. 내가 아버지 회사를 떠나는 날, 어머니는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집이라도 사두었으니 안심이라고 했다. 나는 서울에 원룸을 구했다. 회사가 서울이었는데, 화성까지 통근하기는 너무 멀었다. 이후 사업을 하는 내내 거의 서울에 있어야 했다. 어머니는 화성에서 홀로 떨어져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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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삼촌들이 홀로 남은 외 할아버지를 우리 아파트 바로 옆 빌라 원룸으로 보내 버리셨다.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혼자 계시게 할 수는 없잖아?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반대하셨다. 어머니가 불편할 거라는 이유였다. 주말에 집에 내려갈 때마다 외할아버지가 계신 원룸에 들렸다. 안타까운 마음에 손자들끼리라도 어떻게 도와 드리자고 백곰에게 연락했지만, 나 혼자만의 몸부림이었다.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었어)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력했다. 할아버지, 정말 안 들어오시겠어요? 해피 트리에서 저희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요. 지나고 나니 안 들어오신 게 천만다행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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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에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은 나를 고소했고 계약은 무산되었다. 갚아야 할 돈이 여기저기 생겼다. 어머니에게 생활비도 보낼 수 없게 되었다. 먹고살기 힘든 상황이 되며 할아버지를 찾는 횟수도 점점 줄어갔다. 결국 외 할아버지는 실버타운으로 가시게 되었다. (어느 제주 소년의 일생) 어머니는 나를 원망했다. 네가 무능력한 탓에 우리 아버지가! 생활비를 드리자 못하자 어머니는 가지고 있는 패물과 옷을 팔며 몇 천 원 몇 만 원씩 구하며 버텨 내셨다. 그 와중에 나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것이다. 다음 달에 들어오기로 확정된 돈이 있었고, 급히 처리해야 하는 건이 있었다. 급한 불만 끄고, 다음 달에 메꾸자! 하지만 이런 이벤트는 클리셰가 있다. 예정된 돈이 안 들어오는 것이다. 나도 같은 상황을 겪게 되었고 갚지 못한 담보 대출은 점점 더 많은 금액을 주는 곳으로 이관되어 갔다. 처음에는 현다이 캐피털, 그다음에는 OK 저금은행, 산와모니 등. 결국 채무는 3 금융권을 지나 사채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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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기안동에 계신 어머니는 수모를 겪었다. 관리비는 미납되었고 사채업자는 집 앞에 찾아가서 인터폰을 누르고 버텼다. 그 탓에 초인종 소리나 문 두드리는 소리, 전화벨 소리에 지금도 트라우마가 있으시다. 결국 나는 회사의 청산과 개인 회생을 선택했다. 파산 전문 법무 법인을 통해 진행했는데, 이미 담보로 잡힌 아파트는 경매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회생 법원에서 판결이 나오기 직전 몇 주간은 난리도 아니었다. 채무가 이 회사에서 저 회사로 계속 옮겨 다니며 안내장과 최고장이 수없이 발송되었다. 경매에 넘어가게 된 이후, 짐을 빼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어머니는 다른 건 다 버리더라도 제발 자신의 식탁 만은 지켜달라고 부탁하셨다. 구미 사택에 갈 때에도 공장 창고에 넣어두었던 물건이었다. 신혼 선물로 받은 특별한 물건이라고 하셨지만, 결국 부탁을 들어드릴 수 없었다. 나는 무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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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모시고 새로 다니게 된 '돌핀' 회사 근처에 있는 구로동 아파트로 이사했다. 계좌가 모두 압류된 상태라서 보증금을 만들 수가 없어 비싼 월세를 각오하고 가야 했다. 물론 보증금 없이 집을 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보증금은 아버지가 빌려주셨다. (물론, 지금은 모두 갚았다.) 아버지는 조건을 걸었다. 회사에 남아 있는 지분을 모두 나에게 넘겨라. 어차피 재산이 모두 압류될 예정이므로 당연히 동의했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집도 사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시지만 나에게만큼은 그렇지 않다. 스스로 극복할 기회를 줄 뿐이다. 그렇다고 아쉽거나 원망하지는 않는다. 이는 내가 부탁한 부분이기도 하니까. 저는 도움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저에게 줄 게 있다면 전부 동생에게 주세요. 아버지는 그 말을 철저하게 지키셨다. 덕분에 약해지지 않을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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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해피트리를 찾은 날. 처음 아파트를 구매했던 부동산에서 서류를 썼다. 열쇠를 넘겨주고 남은 짐을 언제까지 빼달라거나 이후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이 적힌 지침을 받았다. 그럼 저는 이만 짐 정리하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텅 비어 있는 아파트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넓은 거실. 어머니는 집을 사자마자 거실 사이즈를 재고 소파부터 사셨지. 신나서 콧노래까지 부르셨어. 주방에는 미니 TV가 있어서 요리를 할 때나 식사를 할 때 심심하지 않았어. 내가 잠자는 방. 여기에는 침대와 함께 책장과 옷장이 들어왔지. 잠이 안 오면 아무 때나 책을 꺼내 읽었어. 나의 또 다른 방. 여기에는 책상과 PC가 있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 게임도 여기에서 했고, 운동도 이 방에서 했지. 집에 도착하면 항상 이 방에 먼저 들어왔었는데. 지금은 먼지만 있네.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안방으로 이동했다. 어머니의 침대와 화장대, 안마의자와 옷장까지 있던 넓은 공간이었다. 지금은 텅 비어 있고 바닥에 신문지만 깔려 있다. 안방에서 연결된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분다. 신발을 벗고 안방 한가운데 펼쳐진 신문지 위에 가서 앉았다. 텅 빈 나의 집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아니, 나의 것이었던 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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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신문지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잠이 쏟아졌다. 이렇게 집을 사는 경험도, 집을 잃는 경험도 해보는구나. 해피트리. 나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지만, 저 아이들에게는 부디 행복한 나무가 되어 주기를. 내가 떠난 이 공간에 머무는 다른 사람이라도 행복하기를. 이제 더 이상 나의 집이 아닌 공간에서 알지도 못하는 타인들이 행복하기를 빌며. 그렇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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