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귤러의 자리

과거에 대한 집착, 끊어내기 위한 거리두기.

by 마이즈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게임을 만들었다. 당연히 회사에 소속된 입장이었다. 조직에서 인정받는 게임 기획자가 되기 위해 다른 회사의 개발자들과 인맥을 쌓아갔다. 그들을 통해 정보를 얻고 때로는 동기 부여를 받으며 함께 공부하고 성장해 갔다. 그 외에 기자들이나 마케터, 사업 담당자를 비롯해서 업계 사람들과 주로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주위에 있는 대다수가 게임인이 되었다. 같은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유대감이 생겼다. 그것을 업계인이라고 표현했다.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 혹은 게임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게임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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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나는 어떠한가? 여전히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다. 하지만 주 5일 풀타임 근무를 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일이 없을 때에는 한 달에 한 번만 출근한다. 일이 몰릴 때에는 야근도 철야도 아무렇지 않게 함께하지만, 일이 없는 시기가 더 길다. 그렇게 느긋하게 다니는 회사인데도 적게나마 급여가 나오고 4대 보험이 보장되어 있다. 자연스레 남는 시간에는 회사 업무 외의 일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회사 밖의 일에 쓰는 시간도, 벌어들이는 수입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커지기에 이르렀다. 어디까지나 나를 신뢰해 주는 흰 늑대 덕분이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일반적인 직장인들과는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그 부분은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게임 업계인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과의 유대감을 느낄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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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가까이 활동한 게임 기획자 모임이 있다. 같은 직군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주니어 시절부터 서로 많이 배울 수 있었고, 지금은 후배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모임에서 분기마다 세미나를 진행하는데, 나는 현재까지 그곳의 최다 발표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여러 모로 나름의 애정을 갖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안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에 속한다. 그러다 보니 자칫하면 흘러간 사람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일찍이 유명한 선배 개발자들도 이 모임을 거쳐 갔지만, 요즘 세대들은 그분들이 누군지 조차 알지 못한다. 과거의 네임 밸류는 현재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의 유명세에 안심했기 때문이다. 잊히지 않기 위해서는 꾸준히 교류하고 브랜딩 하며 나를 알려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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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잡을 시작하게 된 이후에도 모임에 꾸준히 나갔다. 한 번은 세미나에 갔더니 제자들 여럿이 몰려와서 ‘제자즈’라는 이름으로 인사를 하기도 했다. 뿌듯하기도 하고 흐뭇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들에게 나는 이레귤러라는 것을. 주 5일 풀타임으로 회사를 다니지 않으면서 게임 개발자라고 말하는 것이 다른 분들의 상황과 거리가 멀 기 때문이었다. 입장이 다르니 나를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그들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을 꺼내 와야만 했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나를 존경한다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곤란했다. 이들은 아직 회사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회사 밖에 있는 나처럼 되고 싶다고? 큰일이다. 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현실적인 후배들은 스스로 거리를 두는 것이 느껴졌다. 모처럼 모임에 나왔는데, 자신들의 상황과 더 가까운 인맥을 만드는 것이 당연히 효율적이다. 언젠가 자신을 뽑아줄지 모르는, 상사가 될지 모르는 선배들. 혹은 함께 노력해야 할 동기들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들을 위해서도 그것이 옳다. 이런 모습들을 보며 혼자 결심했다. 오래도록 머문 공간이지만, 가급적이면 거리를 두자. 그것이 후배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나의 정체성과 멘털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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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두어야겠다는 판단은 퍼스널 브랜딩 때문이기도 하다. 꿔다 놓은 보릿 자루가 되는 것은 이미지에도 좋지 않다. 오히려 만나고 싶지만 쉽게 볼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별도로 약속을 잡고 만난다면 대화의 깊이나 집중도도 높을 것이다. 종종 시간을 내어 달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신입보다는 10년 차 이상. 혹은 20년 차가 넘은 사람들이 고민 상담을 위해 나를 찾는다. 혹은 전혀 다른 업계에서 벽에 막힌 경우에 만나자는 연락이 오기도 한다. 진심으로 나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기꺼이 시간을 내어줄 수 있다. 하지만 핏이 벌어진 공간에서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은 나 스스로의 만족감만 남을 뿐이다. 여전히 게임 업계인 이고 싶다는 미련이고 고집일 뿐이다. 따로 약속을 잡고 만나는 분들과는 조금 더 집중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것이 들어주는 입장에서도, 조언하는 입장에서도, 고민을 이야기하는 입장에서도 훨씬 좋을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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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모임에서 파생된 PD 모임만큼은 제외다. 이곳은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 40대들이 있는 곳이다. 50대인 선배님도 계시다. 서로의 힘든 일을 공유할 수 있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PD라는 직종의 외로움을 서로 이해한다. 거기에서 공감과 위안을 찾는다. 이 중에는 게임 회사의 대표도 있고 대기업의 사업 PM도 있다. 혹은 국내 TOP급 특정 직무 스페셜 리스트도 모여 있다. 그들에게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의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며 동기 부여를 받을 수도 있다. 아예 다른 분야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어 시야를 넓히는 효과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있고 싶은 곳을 고르는 것이 아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 나에게도 필요한 곳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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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모임을 꾸준히 나가고 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마냥 신기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게임 업계인들 뿐인데, 독서 모임에서 그들을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독서 모임은 그동안 소속되어 지내온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것이다. 비단 게임뿐 아니라 어느 직종, 어느 분야든 결국 비슷한 업계 사람끼리 모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취미 모임은 다양성 측면에서도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그들에게 나는 신기한 존재였다. 게임 개발자를 처음 만난다는 사람이 많았다. 여기에 또 다른 기회가 있었다. 그들이 아는 유일한 게임 개발자가 나라면, 게임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을 때 떠올려주지 않을까? 실제로 독서 모임에서 알게 된 분을 통해 게임 관련, 혹은 게이미피케이션 관련 일을 받기도 했다. 자문이나 상담을 요청하시는 분도 계셨다. 다양한 모임의 형태로 타 분야와의 접점을 만드는 활동을 늘려갔다. 내가 보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로 시야가 확장되면서 동시에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다양한 제안이 들어올 수 있는 창구가 되기도 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초석이 되기도 한다. 노매드로 산다면 일을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찾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새로운 분야의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은 일이 나를 찾아오게 하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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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업계 안에서의 나는 제너럴 리스트다. 다른 사람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개발한 플랫폼이나 장르, 사용한 기술의 개수만으로 보면 틀림없이 상위 그룹에 속할 것이다. 같은 것을 두 번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데다가 지금까지 개발한 50여 개의 게임 중 겹치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니까. 물론 그렇기 때문에 각 항목에 대한 디테일이나 깊이는 하나를 오래 한 사람보다 얕을 것이다. 따라서 게임 업계 안에서의 나는 스페셜 리스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다른 분야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다. 게임이라고 그룹핑되는 분야의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게임의 스페셜리스트로 보인다는 것이다. 만약 게임 밸런스의 스페셜리스트였다면, 다른 분야에서 볼 때 그는 게임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밸런스의 스페셜리스트일 것이다. 그에게 다른 분야의 밸런스를 묻거나 요청할 수 있다. 게임 시나리오의 스페셜리스트였다면, 다른 분야에서 볼 때 그는 게임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시나리오의 스페셜리스트일 것이다. 그에게 다른 분야의 시나리오를 묻거나 요청할 수 있다. 실제로 게임 시나리오 기획자들 중에 다른 콘텐츠의 대본이나 설정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웹 소설이나 출판물을 쓰기도 한다. 이런 시선의 차이 또한 신선했다. 왜 한 우물을 파지 않냐고 걱정하던 선배님들이 생각났다. 아마 외부 업계와 교차되는 경험을 못해보셨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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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향인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불편해하고, 그래서 익숙한 사람들만 만나는 편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노력을 해야만 '익숙했던' 그룹에 간신히 속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의미도 없고 비효율 적인 일인가. 나에게도,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덩그러니 남을 수는 없다. 회사 일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다른 일들을 더 해야 하니까. 우연히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자 돌파구가 보였다. 내가 그동안 해온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는 신선하게 비치는 듯했다. 서로에게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때부터 다른 업계의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이 즐거워졌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이미지 관리와 집중된 시간을 위해서 만남 요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는 여전히 긴장이 된다. 첫 모임에서는 말을 더듬거나 손을 떨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극복했을 때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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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이 선택이 옳았음을 여러 번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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