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스테이지

원더보이 인 몬스터랜드

by 마이즈

꿈을 이루었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이지만 어째서인지 참게 되었다. 차 안에는 나 혼자임에도 말이다. 액셀을 밟은 발에 힘이 들어갔다. 그동안의 여정을 떠올렸다. 얼마나 절실했던가. 얼마나 노력했던가. 좌절했던 시기도 있었다. 포기하고 싶은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해냈다. 소리 내어 말한다. 고생했어. 나를 향한 말이지만 굳이 입으로 내뱉고 싶었다. 내비게이션을 보며 고속도로로 빠지는 길을 확인했다. 도착 예정은 3시간 뒤. 이제 집에 돌아가서 마음 편히 쉬자.

madmaiz_a_lone_man_in_the_drivers_seat_at_dusk_monochrome_indie_b4184f8a-0ac.png?type=w1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차는 고속도로가 아닌 논길 위에 있었다. 내비게이션에는 오류 메시지가 표시되어 있다. 현재 위치를 찾을 수 없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선 걸까? 운전 중에 쓸데없는 생각을 한 탓이다. 평정심을 유지해야 했다. 좁은 논길은 긴 운전 경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쉽지 않았다. 느릿느릿 운행을 하고 있으니 답답했다.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해가 내려가고 있었다. 잠시 후면 어둠이 올 것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만으로 이 길을 가는 것은 무리겠지. 어떻게 해야 할까? 지는 해를 보며 생각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귀가 길이 아닌 인생의 길에 대한 고민까지. 나는 이제 무얼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할까? 이제는 내비게이션도 길을 찾아주지 못한다. 평생을 꿈꿔온 일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환희와 기쁨이 아닌 막막함으로.

madmaiz_a_small_car_moving_slowly_along_a_narrow_rural_rice_fie_16e932c3-80d.png?type=w1

잔뜩 긴장한 채 차를 몰았다. 논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운전했다. 계속 바퀴의 위치를 확인해야 했다. 급격히 피로가 쌓였다. 그러던 중 조금 떨어진 곳에 불 빛이 보였다. 작은 건물이 있는 것 같았다. 농가일까? 저기까지 가면 조금 쉴 수 있을 거야. 목표점이 생겼다. 일단 심호흡을 하자. 신이 나서 달려가면 논 길에 빠질지도 모른다. 더욱 신중하게 천천히 차를 몰았다. 긴장감은 커졌지만 어쩐지 조금 덜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madmaiz_a_car_on_a_dark_rural_path_headlights_cutting_through_d_e99f1cac-994.png?type=w1

건물의 정체는 오락실이었다. 수십 년 전에나 있었을 법한 옛날 오락실. 믿기지 않았다. 주변은 논 밖에 없었다. 그 한가운데 위치한 오락실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조합이었다. 심지어 불이 켜져 있다. 버려진 건물은 아니라는 얘기다. 주변에 작은 공터가 있어 차를 세웠다. 휴대폰을 꺼내 오락실의 외관을 찍었다. 요즘 사람들은 신기한 것을 보면 꼭 카메라부터 들이민다니까. 자조하며 문을 열고 발을 들였다.

madmaiz_a_man_opening_the_door_to_a_dim_retro_arcade_interior_f_2f15dbba-e4b.png?type=w1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수십 개의 게임기가 놓여 있었다. 추억 속에만 묻혀있던 풍경이었다. 화면마다 다양한 게임이 켜져 있었다. 둘러보니 어린 시절에 해본 게임들도 눈에 띄었다. 한 구석에 동전 교환소가 있었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 동전을 바꿔준다고? 약간의 호기심을 갖고 교환소를 들여다봤다.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이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걸까? 잠시 게임이라도 하면서 기다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특별한 공간에 와서 게임도 안 해보고 가는 건 손해지. 주머니를 털어보니 백 원짜리 몇 개가 나왔다. 어떤 게임을 하면 좋을까? 무난하게 방구차? 버블보블? 둘러보던 중 어떤 화면을 보고 멈춰 섰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팬티 한 장만 걸친 아기가 칼을 찌르고 있다. 어린 시절에 많이 했던 게임인데. 어쩐지 나의 어린 시절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이렇게까지 귀엽지는 않았지만.

SE-9094310e-eb4a-45ce-8977-45fe0efc0939.png?type=w1

원더 보이 2. 마지막 100원이 남았을 때 하던 게임이었다. 가장 오래 할 수 있었고 끝까지 깰 수 있는 게임이었으니까. 집에 가기 전에 마지막 용을 잡으면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지금 해도 끝까지 깰 수 있을까? 100원짜리 동전을 넣었다. 어린 시절에는 매번 비장한 마음으로 했다. 매일 깨던 것을 못 깨면 실패하는 느낌이 들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오히려 못할 거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어릴 적에 했던 기억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공략 방법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못하면 어때? 조심스럽기보다는 과감하게 게임을 진행했다. 조금씩 어린 시절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마지막 용이 나타났다. 어떻게 공략했더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쩐지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격전 끝에 용을 무찔렀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용의 정체는 기계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결국 나는 용을 무찔렀다. 폭발적인 쾌감이 밀려들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결국 또다시 해냈구나.

SE-78174777-2d2f-49e3-8e19-52b5935cace6.png?type=w1

수없이 본 엔딩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는 깨는 순간 일어섰지만 지금은 끝까지 보고 싶었다. 메시지가 출력되며 화면은 위로 올라가 우주를 비춘다. 맞아. 이런 장면이 있었지. 그래서 다음 편을 기대했었어. 원더 보이 우주 편! 하지만, 다음 편은 우주 이야기가 아니었지. 그렇다면 용을 무찌른 원더 보이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화면을 멍하니 보던 중 메시지가 떴다. 원더 보이여. 아직 모험은 끝나지 않았다. 화면이 전환되며 우주 행성에 서 있는 내가 보인다. 머리에 동그란 어항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다. 어? 이런 장면이 있었나? 스틱을 오른쪽으로 밀자 나는 걷기 시작한다. 그렇게 여러 번 클리어 한 게임인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스테이지였다. 지금까지는 기억과 경험에 의존해서 플레이했는데… 두려움이 몰려왔다.

SE-8a970848-0339-4b80-9a96-3831b50a0d98.png?type=w1

땡그랑.


게임기 위에 백 원짜리 하나가 놓였다. 화들짝 놀라 쳐다보니 어린 소녀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손님, 이제 영업시간이 마감되었습니다. 아직 플레이를 마치지 못하셨으니 동전은 돌려 드릴게요. 소녀는 친절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나 이질적인 느낌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지 비현실적이고 기묘했다. 원더 보이는 알 수 없는 행성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게임기에서 멀어지자 급격히 현실감이 돌아왔다.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부모님 계시니? 내가 길을 잃어서 그러거든. 소녀는 무표정하게 돌아보며 말했다. 어쩐지 압도되었다.


“어른이라면 길은 스스로 찾으세요.”


소녀에게 떠밀려 오락실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등 뒤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를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업을 마감했으니 곧 나오겠지? 그 애도 집에는 돌아가야 할 테니 다시 길을 묻자. 늦은 밤길이니 태워다 주는 것도 좋겠다. 많이 어려 보이던데 부모님의 오락실인 걸까? 한참을 기다려도 소녀가 나오지 않아 일단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걸었다. 몸이 으슬으슬했다. 익숙한 시동 음 뒤에 들리는 내비게이션 소리. 현재 위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주변은 마치 우주 한복판 같았다. 헤드라이트를 켰다. 멀리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바로 앞의 길만 보일 뿐. 빙긋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