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런
유럽의 멋진 해변가. 상쾌한 바람을 느끼며 붉은색 오픈카를 운전한다. 내 옆에는 아름다운 금발의 미녀가 앉아 있다. 평생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이다. 운전을 좋아하지도, 해외여행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값 비싼 페라리 스포츠 카에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조합되었을 때, 느껴지는 몽글몽글한 감정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로망이라는 것일까? 하지만 이 특별한 경험에는 조건이 있다. 정해진 시간 안에 깃발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동차는 멈춰 버린다. 오늘도 실패했다. 게임기에서 일어나 오락실을 나왔다. 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이제 집에 가야겠지.
아내와 눈을 마주치기 힘들다. 시선은 TV를 향한 채 머릿속에서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화려한 사람이었다.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수많은 남자들의 선망을 받았다. 하지만 나와 결혼하면서 더 이상 꾸미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매력이 떨어졌냐고? 아니다. 대신 수수하고 차분한 매력을 갖게 되었다. 지금의 아내도 좋아 하지만, 종종 과거의 화려한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녀와 함께 유럽의 해안가를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옆에서 수수한 모습의 아내가 왜 저걸 보고 웃냐며 핀잔을 준다. TV에는 긴급 구호 광고가 나오고 있다. 아차.
며칠째 나는 해안 도로를 달린다. 다른 차들을 피하고 추월한다. 충돌하면 상대도 나도 모두 손해다. 요리조리 피하면서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가야 한다. 시간제한 안에 골을 통과하지 못하면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된다. 카운트 다운의 압박감이 강렬하다. 이 게임은 회사 생활과 닮아 있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결코 돌아봐서는 안된다. 함께 달리는 모든 이들을 추월해야만 한다. 그리 열심히 달렸지만, 오늘도 결국 시간 안에 골을 통과하지 못했다. 나는 또다시 멈춰버렸다.
회사는 잔인하다. 대기업에 취업해 25년간 일했다. 끝없는 경쟁의 시간이었다. 그 끝에 나는 어느새 부장이라는 직책까지 올라섰다. 모두들 조만간 상무가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에게 날아온 것은 정리 해고 통지였다. 이유가 무얼까? 아마 마지막 카운트 다운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이 문제일 것이다. 나 같은 퇴물보다는 젊은 임원이 생기는 편이 회사에서도 좋을 테니까. 집에는 말하지 못했다. 아들도 아직 대학생이고 아내는 한 번도 일을 해보지 않고 살아온 전업 주부였다. 가장이 불안한 모습을 보여서는 곤란하다. 복잡한 마음으로 회사를 나선 마지막 퇴근길. 평소에 타지 않던 노선의 버스를 탔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장소로 가고 싶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창 밖에 한적한 논 길이 보여 충동적으로 내렸다. 버스가 떠난 뒤 쭈그려 앉아 울었다. 혹시 누군가 들을까 싶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실컫 울고 나니 어쩐지 걷고 싶어졌다. 멍 한 상태로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옛날 오락실을 발견했다.
땡그랑
빨간 스포츠카가 해변을 달리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소녀가 와서 동전을 넣어주었다. 영업을 위한 서비스인 걸까? 다른 게임은 어려워 보이지만 운전이라면 자신 있다. 핸들도 달려있고 페달도 있는 것을 보니 실제 운전과 비슷할 것 같다. 이건 나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애 첫 게임을 하게 됐다. 그리고 매일 아침 이곳으로 달려와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유럽의 해변을 달리게 되었다. 가족들은 내가 회사에 출근하는 줄 알고 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아직은 말할 수 없었다. 이 게임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나온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수는 없다. 선택의 순간에도 여전히 달려야 한다. 속도를 늦추면 깃발을 넘지 못할 테니까. 순간적인 판단으로 방향을 정한다. 나의 현재 위치일 수도 있고, 지난번에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호기심이기도 하다. 혹은 그저 바다 쪽으로 가고 싶어서 선택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의 지난 선택들을 떠올린다. 대기업의 부장이 되기 위해 걸어온 길은 항상 옳았을까? 만약 그때 다른 길로 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다. 이미 가야 할 길은 정해졌으니까. 막상 달릴 때는 그저 앞만 보고 무작정 달린다. 따라서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다. 아무 쓸모도 없는 미련일 뿐이다.
늦잠을 자고 싶어도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출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가족들이 불안해할지 모른다. 언젠가는 말해야 할 텐데.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선다. 하지만 내가 가는 곳은 회사가 아닌 논길 한가운데 있는 오락실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눈다. 완전히 터줏대감님 들이다. 각자 어린 시절 게임에 얽힌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으신다. 예전 같으면 지겹다거나 한심하다고 생각했을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은 부럽다. 평생 공부와 일에 집중하며 살아온 나에게는 저런 추억이 없으니까. 오늘도 빨간 자동차 게임을 구경한다. 많은 남자들이 멋진 차에 대한 로망이 있다고 하던데, 나에게는 그런 감각이 없다. 그럼에도 이 게임이 끌리는 이유는 나의 삶과 닮아 있기 때문일 게다.
게임도 반복하면 조금씩 잘하게 되는 것 같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조금씩 더 멀리 있는 깃발을 통과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깃발을 통과하는 순간,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군중이 모여들며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길이 막혔다. 차가 멈춰 선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왜 내가 가야 할 길을 막아서는 걸까? 마치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나의 모습 같다. 슬픔이 차오르는 순간, 선글라스를 낀 운전자가 차에서 내린다. 아직, 갈 수 있는 건가? 이 사람이라면 저 인파 속으로 들어가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붉은색 페라리만큼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나의 두 발로.
옆 자리에 앉아 있던 금발 미녀가 차에서 내리더니 달려온다. 나에게 젊음을 빼앗긴 과거의 아내가 화면 속에 있는 것만 같다. 사람들이 환호한다. 길이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는 상황인데, 왜 소리를 지르는 걸까? 혹시 나를 응원하는 거야? 또 다른 여성이 다가와 선글라스의 남자에게 트로피를 건넨다. 지금이다!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멈춰 버렸다고. 하지만 아직 갈 수 있을 거라고. 회사가 없어도 내 두 발이 있으니 믿어달라고. 오락실 밖으로 뛰쳐나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 말이 있어. 어... 그러니까... 나... 회사에서... 그러니까... 음... 그냥...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아. 하하 내가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더라고. 결국 말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녀가 나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 화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른 루트로 가보세요.”
화면에는 내가 지나온 루트가 표시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