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면

스트리트 파이터 2

by 마이즈

한국 랭킹 51위. 나의 현재 성적이다. 공부를 잘해서 좋겠다고? 하하. 공부는 무슨. 졸업한 지 한참이다. 랭킹 이야기는 스트리트 파이터다. 유명한 격투 게임 시리즈인데 알고 있지? 스트리트 파이터 8이다. 대학을 졸업 후 힘들게 취업했지만 수습 평가에서 탈락했다. 두 번째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 더 취업에 도전하다가 시골 본가로 내려왔다. 애초에 나는 회사와 잘 맞지 않는 인간이었던 것 같다. 막상 한적한 시골에 오니 할 일이 없어서 게임기를 구매했다. 덕분에 요즘은 매일 스트리트 파이터 8로 온라인 대전을 즐긴다. 오래전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스트리트 파이터로 은메달을 딴 선수가 있다. 그것도 40대의 나이에 말이다. 진짜 대단하지 않나? 그것이야 말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40대까지 스트리트 파이터에 매진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가 난리를 치셨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문을 잠그고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화장실은 어쩔 수 없어서 모두가 잠든 틈에 가거나 몰래 후다닥 다녀온다. 그럴 때면 문 앞에 놓인 음식을 발견하고는 한다. 역시 엄마는 내 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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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게임을 하는데 갑자기 통신이 끊겼다. 젠장, 거의 다 이겼었는데. 공유기 문제인가? 확인해 보고 기가 막혔다. 신호가 아예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인터넷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게임을 못할 내가 아니다. 오프라인 모드로 계속 연습을 했다. 하지만 역시 무언가 허전했다. CPU 상대와의 대전은 아무리 난도를 높여도 시시하다. 휴대폰 역시 끊긴 지 상태라서 와이 파이로만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터넷도 볼 수 없었다. 미쳤나? 아버지와 어머니도 인터넷은 필요할 텐데… 심심함이 점점 커져갔다. 나를 포기하게 하려는 수작이겠지. 절대 지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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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방 문 앞에 놓인 음식에 쪽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엄마가 쓴 것 같았다. 아버지와 상갓집을 다녀올 테니 바깥바람을 좀 쐬고 편히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밤늦게 올 거라고 쓰여 있었다. 역시 엄마는 내 편이라니까! 집안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지만 흥미로운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책은 지루했고 TV도 치워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진짜 징하다 징해. 오랜만에 바깥공기나 쐴까 싶어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밖을 나와서 인지 마치 처음 보는 동네를 걷는 느낌이었다. 동네 어른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뿔싸. 아버지에게 말이 들어가면 곤란하지 않나? 사람이 없는 논길 쪽으로 발길을 틀었다. 그렇게 걷다가 신기한 장소를 발견했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다던 오락실처럼 보였다. 자연스레 관심이 생겨 내부로 들어갔다. 화면을 보던 중, 익숙한 캐릭터가 눈에 띄었다. 어? 이건? 스트리트 파이터 2? 이게 언제 게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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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그랑


어느새 다가온 한 소녀가 게임기 위에 동전을 얹었다. 이 게임을 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소녀는 잠시 내 눈을 쳐다보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나한테 주는 건가? 내 손짓에 대답하지 않은 채 소녀는 몸을 돌렸다. 100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었다. 그래. 한번 해볼까? 동전을 넣고 게임을 시작했다. 스트리트 파이터 8은 나중에 나온 게임이므로 기술이 훨씬 많다. 오래된 이 게임에는 캐릭터마다 기술이 몇 개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쉽게 익숙해질 수 있었다. 콤보 시스템의 원조는 이런 거였구나. 프레임 스킵도 빡빡하지만 가능하네? 한참 흥미롭게 게임을 하던 중, 옆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았다. 뭐지? 왜 내 옆에 앉는 거야? 그리고 갑자기 게임이 멈추며 도전자가 있다는 메시지가 떴다. 어? 이 할아버지가 나에게 도전하는 걸까? 나에게는 옆 자리에 있는 상대와 대결한다는 것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매번 온라인으로만 대전했고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름 모를 할아버지에게 패배했다. 절대 실력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당황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며 웃으며 뭐라고 말하려고 하길래 뛰쳐나와 집으로 달려왔다. 분했다. 이겼으면 다야? 나를 비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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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회사의 사수는 나를 너무 괴롭혔다. 내 작업물에 대해서 끊임없이 딴지를 걸었다. 그렇게 잘하면 직접 할 것이지. 왜 나를 시키는 거지? 수정이 많아지고 업무가 늦어지다 보니 주변 사람들도 모두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사수는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어차피 고쳐야 할 테니 애초에 대충 해서 전달했다. 그게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수습에서 떨어지고 다시 노력해서 들간 두 번째 회사의 사수는 정 반대였다. 나를 방치했다. 업무를 주지 않았기에 나는 회사에 가서 눈치만 보며 시간을 때워야 했다. 모두 나를 게으르다며 비웃었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일을 줘야 하지. 그렇게 두 번 수습 평가에서 탈락한 뒤부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짐을 느꼈다. 회사 사람들 뿐 아니라 친구들도, 지인들도 모두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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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비웃음을 뒤엎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스트리트 파이터 8이었다. 항저우 아시안 게임의 오래된 영상을 우연히 접했고 그 뒤에 선수와 관련된 영상을 모조리 찾아봤다. 묵묵히 노력하면 나도 저 선수처럼 언젠가 크게 꽃 피울 일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사람들을 피해 내려온 시골에서, 그리고 내가 목숨을 걸고 도전하려는 게임의 오래된 전작에서 이름 모를 할아버지에게 비웃음을 당한 것이다. 분했다. 복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무턱대고 나간다고 해도 이기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요즘 게임도 아닌 그렇게 오래된 게임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아니야. 이런 생각은 패배주의다. 꼭 이겨야 해. 내가 극복해야 할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밤새 분한 마음에 고민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의외로 싱겁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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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 놓인 음식을 가져가려고 문을 열었을 때, 기묘한 박스가 보였다. 엄마의 쪽지를 보니 아버지의 선물이라고 했다. 왜? 생일인가? 아닌데? 아무튼 선물이라니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 박스를 열어 보니 투박한 옛날 게임기와 타이틀 한 개가 보였다. 스트리트 파이터 2. 왜 이런 옛날 게임기를 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게임을? 아버지에게 오락실의 할아버지가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어쩌면 진짜 운명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일단 게임기를 연결하고 플레이를 시작했다. 두고 보자. 그 할아버지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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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플레이하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설득해야 했다. 왜 이 게임을 하는 것인가? 지금 당장 8편을 플레이할 수도 있었다. 비록 오프라인 모드만 가능했지만 이렇게 오래된 게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화려하고 멋진 게임이다. 하지만 나는 오래된 게임기로 스트리트 파이터 2를 했다. 과거로부터 짚어 나가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야. 근본과 코어부터 짚어 나간다면 더욱 게임을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윽고 자신감이 붙었을 때, 나는 오락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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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과 다른 할아버지가 스트리트 파이터 2를 플레이하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동전을 넣고 도전했다. 어라? 플레이하는 느낌이 이상하다. 같은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 집에서 할 때와는 달랐다. 가정용 버전과 오락실 버전이 차이가 있는 걸까? 그동안 연습한 실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할아버지도 제법 게임을 잘했다. 드디어 마지막 라운드. 둘 다 한 대만 맞으면 지는 상황이다. 옆 자리에서 스틱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풍인가? 그렇다면 점프 킥으로 이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만약 대공기라면? 점프를 해서는 진다. 어느 쪽일까? 순간,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의 플레이가 복기되었다. 할아버지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틀림없이 장풍이다! 스틱을 위로 올리고 킥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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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자리 할아버지는 나를 돌아보더니 미소 지었다. 혼란스러웠다. 왜지? 내가 이겼는데? 왜 나를 비웃는 거야? 할아버지는 다시 동전을 넣고 도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승리였다. 졌음에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웃는 표정이었다. 자리를 뜨면서도 오랜만에 찐한 대화를 했다며 어깨를 두드리고 웃었다. 대화? 뭔 소리야? 어쩌면 비웃음이 아닌 걸까? 잠시 후 다른 할아버지들이 몰려왔다. 동전을 손에 든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더 이상 그 표정이 비웃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몰려드는 할아버지들과 정신없이 게임을 했다. 몇 번을 이기고 몇 번을 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락실을 나서는데, 소녀가 나를 향해 말했다.


“경쟁은 서로를 치열하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집에 돌아와 스트리트 파이터 2 게임 케이스를 살펴보았다. 매뉴얼 사이에 낡은 메모가 들어 있었다. 게임기 버전에서 플레이한 연속기가 오락실에서 적용되는지 체크한 메모 같았다. 알고 계셨구나. 다르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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