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존
오늘도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한다. 오늘도 아무 메시지가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 세안을 하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다. 거울 속에는 다 늙은 할머니가 있다. 언제 이렇게 늙었담. 꽃에 물을 주고 집안일을 하면 어느새 점심시간. 식사 후 약을 먹는다. 어차피 오래 살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많은지. 자식들의 잔소리가 무서워서 꾸준히 먹기는 한다. 그리고 나면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다.
가볍게 산책을 나가서 논 길 한가운데 있는 오락실에 들어간다. 하루 중 유일하게 집을 떠나는 시간이다. 오락실을 지키는 귀여운 소녀가 있다. 손녀가 떠오른다. 이곳은 항상 북적이지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아서 좋다. 게임은 단 한판만 하고 돌아온다. 하루에 한 판만. 그것이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이다. 밤이 되면 연속극을 보고 잠자리에 들어간다. 매일 같은 패턴의 반복. 이렇게 살다가 곧 가는 거겠지. 스스로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젠가 평화롭게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하는 게임은 하나뿐이다. 제목이 판타지 존이라고 한다. 초록 초록한 산을 배경으로 밝고 화사한 세계. 여기에서 나는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 다른 게임은 방향이 정해져 있지만 판타지 존은 다르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마음껏 날아본다. 땅에 도착하면 다리가 생겨 뛰어다닐 수도 있다. 어린 시절에 꿈꾸던 장면들이다. 나를 향해 신기한 동물들이 돌진해 온다. 그들을 만나면 죽지만 상관없다. 여기가 이미 천국이니까. 그래서 잘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나이가 되면 죽음을 가깝게 느끼게 된다. 두렵지는 않다. 우리 아이들도 각자 가정을 이루었으니 걱정도 없다. 이 정도면 장수했다고 말할 정도로 충분히 오래 살았기에 억울한 것도 없다. 편안하게 기다릴 뿐이다. 뚱뚱한 생물을 많이 때리면 커다란 나무토막이 나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괜히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 피하며 그저 둥실둥실 떠다닐 뿐이다.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이면 좋겠다. 사람이 많지 않고 신기한 동물들이 잔뜩 있으면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뛰어다닐 수 있는 곳. 그동안 정직하게 살았으니 어쩌면 이런 곳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신기하고 예쁜 공간을 떠다니다가 죽었다. 천국에서 다시 죽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받아들인다. 이건 게임이니까. 잠시 앉아 여운을 느끼는데, 소녀가 다가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분 걸까? 문득 딸이 어렸을 때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 애도 이만할 때가 있었는데. 너무 예뻤지. 소녀를 향해 활짝 웃는다. 내 곁에 자주 와줬으면 좋겠다.
땡그랑
소녀는 내가 앉아 있는 게임기에 동전을 넣는다. 그리고 내 손을 붙잡아 시작 버튼을 누르게 한다. 하루에 한 판. 그것이 나의 루틴인데. 당황스럽다. 하지만 소녀의 손을 거부할 수는 없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기는 싫으니까. 그리고 처음으로 먼저 다가온 날이니까. 소녀를 쳐다보고 묻는다. 더 보고 싶은 거니?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를 위해 오늘만 한 판 더 하기로 결심한다. 다시 게임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화면을 보고 있는 소녀를 위해. 이것도 보렴. 이런 것도 있어. 참 예쁘지? 천국을 산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녀에게 보여주기 위해 게임을 한다.
“오늘은 한 걸음만 더 가주시면 안 될까요?”
한참 넋을 잃고 화면을 바라보던 소녀가 말한다. 화면에 뚱뚱한 생물이 떠다니고 있다. 오늘은 특별히 나무토막을 불러 볼지 고민하던 중에 들려온 말이었다. 무서운 괴물이지만 어쩌면 소녀가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을 날아 뚱뚱한 생물을 때렸다. 하루에 한 번이지만 오랫동안 해온 게임이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이지. 드디어 커다란 나무토막이 나타났다. 역시 무서운 모습이다. 입에서 나뭇잎을 뱉으며 나를 공격한다.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 나뭇잎을 피하며 총을 쐈다. 어? 나무토막이 갈라진다. 그리고 동전이 쏟아진다.
화면이 전환되며 새로운 천국이 펼쳐진다. 매일 보던 초록색 공간이 아니다. 핑크 빛의 산이 보인다. 귀엽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이 공간도 마음껏 날아다니고 뛰어다니고 싶다. 뭐야. 천국도 여러 모습이 있는 거였여? 조금 더 해야 할 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