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태그 토너먼트
배우로 유명세를 얻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좋은 작품을 만난 덕분이다. 내가 맡은 배역은 지식을 미친 듯이 탐구하는 엘리트 교수였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크게 성공했고, 덕분에 주연 배우인 나도 배우로서 전성기에 올라서게 되었다. 여기에 나의 출신 학교가 이슈가 되었는데, 한국에서 최상위 권에 속하는 대학 출신이기 때문이다. 엘리트 교수라는 배역과도 딱 맞아떨어졌다. 덕분에 나는 엘리트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머리가 좋다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것 봐. 엄마 말 듣고 좋은 학교 가기를 잘했지? 과연 그럴까? 정작 나는 그 이미지를 고치기 위해서 매일 공부를 해야 한다. 소속사에서도 자주 말한다. 이미지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어린 시절, 동네에 작은 오락실이 있었다. 손님도 거의 없이 망해가는 가게였지만, 친구들과 자주 놀러 가곤 했다. 그곳에 철권 태그 토너먼트라는 게임이 있었다. 처음 본 장면은 태권도를 사용해서 로봇과 싸우는 한국 남자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 게임에 빠져들었다. 발견했을 때부터 오래된 느낌이었는데, 막상 자료를 찾아보니 예전에는 유명했던 것 같았다. 세상에서 사라진 게임이 존재하던 작은 오락실. 우리는 서로 캐릭터를 맡아서 기술을 찾아내고 서로 대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학원과 과외에 시간을 빼앗기게 되면서 하나 둘 오락실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치면 밤 11시가 넘는데, 나갈 수도 없었고 이미 문을 닫았을 것 같았다. 치열한 입시 경쟁을 하는 동안 철권은 내 마음에 깊이 묻혀 있었던 것 같다.
이 오락실은 무명 배우 시절에 우연히 발견했다. 엑스트라 역할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중에 무언가 이끌리듯 오게 된 장소였다. 논길 한가운데 있는 오락실이라니. 수많은 배우들 속에 무명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딱 맞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철권 태그 토너먼트가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운명이 아닐까? 그때부터 나는 종종 이곳을 찾았다. 무명일 때도 좋았지만, 조금이나마 알려지기 시작했을 무렵에도 이곳에서 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어차피 대부분 노인들 뿐이었고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자세히 보면 알아볼 사람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화면에 집중하고 있기에 편안한 마음이었다.
철권 태그 토너먼트의 좋은 점은 다양한 캐릭터였다. 보통 주력 캐릭터를 하나씩은 갖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배우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싶었는데, 게임도 마찬가지였다. 태권도 사범이 되기도 하고 건달이 되기도 했다. 태그 게임이라서 캐릭터를 둘 씩 골라야 했는데, 그 두 명의 조합을 상상하는 것도 즐거웠다.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오면서 매번 다른 캐릭터와 조합을 시험했다.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언젠가 다시 만나면 이번에는 내가 제일 잘하지 않을까? 이는 나에게 힐링이며 연구 공부였고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만큼 나에게 이 오락실은 특별한 장소였다.
오랜만에 찾은 오락실은 달라져 있었다. 매번 편안하게 오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썼다. 한적했던 장소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노인만 있던 장소였지만, 지금은 젊은 사람이 더 많았다. 게임을 하는 사람보다는 사진을 찍고 떠들며 잡담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전 예능에 신기한 오락실이 나왔다더니 이곳이었던 걸까? 조용히 철권 태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충격받았다. 게임기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철권 태그 토너먼트였다. 혹시 예능에서 연예인이 플레이한 게임이 이거였나?
땡그랑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중, 내 손에 동전 하나가 들어온다. 오락실에서 일하는 소녀다. 눈을 잠시 마주치고는 돌아서서 교환소 쪽으로 가버린다. 미안하다는 의미일까? 그냥 가지는 말라는 의미일까? 다시 게임기를 향해 돌아선다. 누군가 게임을 할 때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들린다. 잘한다. 못한다. 저기는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저 캐릭터는 안 좋은데. 게임 플레이에 대한 내용만 들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 게임하는 사람 못 생겼다. 저기 저 사람 마음에 드는데, 번호 물어볼까? 게임뿐 아니라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도 시선이 꽂힌다. 혹시 이 게임을 하는 순간 나를 알아보지는 않을까?
명문 대학교를 나온 엘리트 배우. 지식을 탐구하는 교수의 이미지를 지켜야 하는 나. 게임은 허용 범주일까? 문득 어머니가 떠오른다. 게임만큼은 절대 안 된다는 어머니.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한다. 차라리 전략 게임이라면 좋았을 텐데. 격투 게임 안에 들어있는 심오함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겠지. 선글라스 너머로 사람들을 살핀다. 관찰과 호기심의 시선들. 게임만이 아닌 이 공간을, 사람들을 지켜보는 수많은 눈동자들. 동전 교환소에 있는 소녀에게 다시 동전을 내민다.
“유명해지는 것은 좋지 않은 부분이 많아요.”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동전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그리고 오락실을 나선다. 이곳을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게임을 하지 않고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한동안, 어쩌면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 100원짜리 동전을 움켜쥐었다. 주먹 쥔 나의 손이야 말로 철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