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기까지

카발

by 마이즈

우리 동네에는 오락실이 있다. 이제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도 몇 없는 특별한 공간인데, 그것이 이런 시골 한 복판에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남은 여생을 조용히 살기 위해 귀촌을 했는데, 운명처럼 오랜 시간 좋아했던 추억의 장소가 나타난 것이다. 어느새 80을 넘어 90에 가까운 나이. 늙어버린 내 모습에 우울감이 들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하루에 한 번씩 게임을 끝까지 클리어하면서 아직 건재함을 느끼곤 한다. 엔딩까지 보려면 몇 번이나 이어할까? 놀라지 마시라. 나는 단 100원으로 게임을 클리어한다. 전문 용어로 원 코인 클리어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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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오락실을 찾았는데, 멀리서부터 무언가 이상했다.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차가 여러 대 와있었기 때문이다. 오락실 안에는 조명이 설치되었고 TV인지 인터넷에서 인지 본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카메라가 가득했다. 뭐지? 여기에서 뭘 찍는 건가? 궁금하긴 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도 게임을 클리어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한다. 젊은 애들도 못하는 원 코인 클리어다. 다행히 내가 하는 게임은 구석에 있었다. 촬영에 걸리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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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을 넣고 게임을 시작한다. 파란색 군복을 입은 나의 뒷모습이 보인다. 일단 화면에 보이는 집을 향해 총을 쏜다. 집이 와르르 무너진다. 적군과 탱크들이 나와 나를 향해 총을 쏜다. 굴러서 피하고 응사한다. 적들은 나 하나를 잡겠다고 헬기도 띄우고 잠수함도 보낸다. 전투기가 날아오며 공중 폭격을 하기도 한다. 훗. 하지만 소용없다. 나는 역전의 용사. 나의 탄환이 정의를 구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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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몇 사람이 뒤에 와서 구경하는 것 같다. 평소에는 없었던 일이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할아버지가 이런 게임을 하는 모습은 혹시 그림이 될까요? 게임 화면이 좀 구리지 않아요? 그렇다고 예쁘거나 레트로 감성이 느껴지는 화면도 아니고요. 3D 흉내를 내긴 했지만 기술 수준이 영 별로네요. 하긴 계속 한 화면에서만 움직이네요. 지루하겠어요. 다른 게임으로 찾아봅시다. 뒤에서 말하던 놈들은 우르르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괜히 신경이 쓰이게 하다니. 덕분에 적을 쏠 타이밍을 놓쳐서 시간이 더 걸려 버렸다. 하지만 상관없다. 적의 공격은 잘 굴러서 피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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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촬영이 시작된 모양이다. 연예인의 과장된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나와는 관계없다. 나는 적들을 물리치고 오늘의 세계를 구하면 그만이다. 가급적 외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게임에 집중하자. 원 코인을 놓쳐서는 곤란해. 차라리 계속 시끄러우면 좋으련만,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지? 하지만 화면에서 눈을 뗄 수는 없다. 적들의 공세를 견디며 드디어 적의 잠수함을 파괴했다. 스테이지 클리어 연출과 점수 계산이 나오는 잠깐 사이, 주변을 둘러봤다. 촬영하러 온 것 같은 사람들이 내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뭐야? 내가 방해라도 된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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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몇 이 다가온다. 하지만 다음 스테이지가 시작되어 나의 시선은 화면으로 고정된다. 어르신, 자리 좀 옮겨 주시면 안 될까요? 야, 그러지 마. 지금 화면에 총알 날아오는 거 안 보여? 어차피 금방 죽으실 거야. 아마 저 남자는 나를 위해서 한 말일 게다. 하지만 죽을 거라니? 나는 죽지 않기 위해서 이 게임을 하고 있단 말이다. 잠깐 컨트롤이 흔들렸지만 이를 악물고 집중했다. 나는 죽지 않아. 끝까지 하고 말 테다! 내가 이 게임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할걸? 쏠 수 있는 타이밍에 한 번 더 구르기를 누른다. 최대한 시간을 끌며 이들을 괴롭히고 싶어졌다. 동시에 나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100원으로도 세계를 구하는 역전의 용사란 말이다. 죽을 거라고? 절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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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그랑


소녀가 다가와 동전 하나를 기계에 얹는다. 이 오락실을 관리하는 아이다. 나에게 동전을 얹는 것은 처음이다. 무슨 의미일까? 너마저 나보고 죽으라는 거니? 나도 모르게 손이 멈춘다. 하지만 적의 탄환이 닿기 직전 다시 구르기 조작을 한다. 무의식이다. 갑자기 게임이 낯설게 느껴진다. 내가 수없이 구한 세계인데. 생판 모르는 놈들, 멋대로 침범한 놈들 때문에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격일세. 우울해지는 와중,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끝까지 하시고 오늘은 한 번 더 하세요.”


그 한마디에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스스로 적의 탄환을 향해 돌진한다. 폭탄도 많이 남아있지만 상관없다. 매일 원 코인 클리어를 하던 게임이지만, 오늘은 끝을 보지 못한 채 멈췄다.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다. 100원은 주머니에 넣는다. ‘한 번 더’는 아껴야지. 오락실에서 조용히 빠져나온다. 내일 다시 와야지. 나의 자리가 여전히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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