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봄버맨

by 마이즈

모델 일을 한지 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무명이다. 이에 대해 여러 컨설팅과 멘토링을 받았는데, 결국 말하는 것은 모두 같았다. 엣지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고 무난하지만 남보다 튀는 개성이 없다는 것. 덕분에 주역이 될 일은 들어오지 않았다. 항상 누군가의 뒤에 남아있을 뿐. 처음에는 꿈꾸던 모델이 된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무명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통스러웠다. 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무엇일까? 누군가 알려준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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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방송에서 특별한 공간을 마주하게 되었다. 시골 논 길 한가운데 있는 레트로 오락실. 요즘 시대에는 사라져 버린 공간이었고, 인터넷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관광객이 찾을 정도라고 한다. 문득,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검색창을 열고 게임 걸, 게임하는 여자, 게임하는 모델 등의 키워드를 조사했다. 동시에 레트로 게임을 좋아하는 인구도 조사하고 현재 트렌드 순위도 체크했다. 이 콘셉트 먹힐 것 같은데? 레트로 게임, 그중에서도 오락실 게임을 대표하는 여성. 전 세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도 주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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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날을 잡고 화제의 장소를 찾았다. 느낌이 왔다. 이런 배경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다양한 공간에서 사진을 잔뜩 찍었다. 셀카 봉을 들고 영상도 몇 개 찍고 쇼츠도 만들었다. 촬영에 하루를 전부 쓰고 돌아와서 이미지와 영상 편집에 며칠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레트로 게임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커뮤니티 등에 하나 둘 식 업로드를 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 두근두근 설렜다. 내일이면 댓글이 달리겠지? 어쩌면 잔뜩 공유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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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과 너무 달랐다. 겜알못이네. 이 공간이 뜨니까 별별 기생충들이 다 꼬이네. 핫한 장소라니까 배경으로 써먹을 생각만 하는 구만. 화면에 insert coin이라고 쓰여있는데, 게임하는 척은 뭐냐. xxxx게임을 하는데 스틱 잡은 모양 좀 보소. 온갖 비아냥이 난무했다. 그나마 게임을 잘 아는 지인에게 사진을 보내고 물었다. 대체 뭐가 이상한 건지 잘 모르겠어. 다들 미친 거 아니야? 지인이 답변했다. 게임을 이용할 생각을 하면서도 하는 척만 하는 네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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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 다시 오락실을 찾았다. 이번에는 직접 게임을 해볼 생각이다. 어떤 게임을 해야 할까? 너무 많은 기계가 있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화면이 알록달록해서 예뻐야 해. 너무 어두운 톤은 내 이미지를 깎을 수 있어. 너무 어려우면 못하는 티가 나니까 쉬워 보이는 것을 고르자. 마지막으로 중간중간 사진을 찍어야 하니까 계속 움직여야 하는 것은 제외! 나름의 기준을 갖고 게임을 구경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건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있으니 곤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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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게임을 찾던 중 한 소녀를 발견했다.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저 아이가 게임할 때를 기다려서 사진을 함께 찍는 것도 좋겠다. 틀림없이 좋은 댓글이 달릴 거야! 세상은 아이들에게 관대하니까! 소녀는 오락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게임기 하나 앞에 멈춰 섰다. 곧바로 다가갔다. 이 아이는 어떤 게임을 하는 걸까? 소녀의 시선 끝에 있는 화면을 봤다. 엇? 딱 내가 찾던 게임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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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그랑


소녀가 게임기에 동전을 넣는다. 그리고 뒤로 한 발 물러서서 나를 쳐다본다. 나보고 하라고? 당황스럽다. 아이가 하는 모습을 옆에서 같이 찍으려고 했는데. 하지만 모처럼 게임을 하러 왔고, 조건도 일치한다. 마침 주변에는 소녀와 나, 단 둘 뿐이다. 용기를 내서 자리에 앉아 게임을 시작했다. 생각한 대로 쉬운 게임이었다. 스틱으로 움직이고 버튼을 누르면 폭탄을 설치한다. 폭탄이 터질 때 사방으로 불꽃이 펼쳐졌다. 그 순간을 노려 셀카를 찍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좀 더 익숙해지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게임에 집중하기로 했다. 하나하나 알아가는 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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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열중하던 중, 스테이지를 넘어가는 장면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혹시 사진 찍어도 될까요? 사진은 보내 드릴 게요. 고개를 돌려보니 몇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개인인 것 같았다. 어째서일까? 포즈를 취하지도 않았고 그저 게임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프로필 촬영은 내가, 혹은 회사에서 돈을 써서 사진사를 고용한다. 반대로 사진사들은 모델을 섭외해서 사진을 찍는다. 어느 쪽에서든 돈이 들어간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냥 찍겠다는 건가? 나는 프로인데. 이 장소와 너무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서 놀리려는 걸까? 며칠 전 악플들이 떠올라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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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심이니까요.”


옆에 있던 소녀가 한 마디 거든다. 그 말에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경험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하나 둘 나를 찍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제 나는 레트로 게임걸이 될 수 있는 걸까? 저들 중 미디어 소속인 사람도 있지 않을까? 혹은 이번 일을 계기로 게이머들 사이에서 내가 알려질 수도 있을까? 아니,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즐겁게 게임을 할 뿐이고 그 모습을 좋게 보고 남겨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 게임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다른 게임들은 또 어떤 재미를 선사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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