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판

버추어 파이터

by 마이즈

나도 언젠가는 최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연습 시간이었다. 학교를 다니다 보니 오락실에 가는 시간이 늦어졌다. 부모님이 게임을 싫어했으므로 오래 머무를 수도 없었다. 들키면 큰일이니까. 그럼에도 동네에서 나름 잘하는 편에 속했다. 특히 버추어 파이터는 자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커멘드 입력이 아니라 직관적인 연속 입력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팀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고 당연히 합격했다. 내 실력이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팀에 들어간 이후 깨달았다. 나는 최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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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전으로 진행하는 대회에 나갈 때면 나도 출전했다. 팀 내에서 나의 순위는 중간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개인전에 나갈 기회는 거의 없었다. 잘 못하는 선수가 나가면 걱정하거나 안타까워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기기라도 하면 더욱 크게 축하해 준다. 상위권 선수가 나가면 당연히 이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다가 지게 되면 걱정 말라고 다음에 더 잘할 거라고 격려한다. 하지만 나 같은 중간 순위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대회가 끝난 뒤 소회를 할 때에도 내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팀 활동을 하면서 단 한 번도 결정적인 자리에 서본 적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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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시골에 오락실을 생긴다고 했을 때,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버추어 파이터가 있을 줄이야. 동전을 넣고, 캐릭터를 고르고, 게임을 시작했다. 적과 거리 벌리며 백 스탭.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적의 가드 모션이 보여서 재빨리 가드 풀기를 했다. 그리고 이어서 적을 띄우고 공중 콤보를 넣었다. 상쾌했다. 게임을 하고 있으니 어느새 뒤에 하나 둘 사람들이 다가온다. 이렇게 잘하는 사람은 오랜만에 본다며 맞은편으로 가서 동전을 넣는다. 초보다. 가볍게 제압했다. 또 다른 사람이 도전해 온다. 이번에는 기술은 조금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조작이 미숙하다. 그렇게 몇 승을 하고 나니 사람들이 나에게 질문 공세를 한다. 팀 출신이라고요? 그거 프로 게이머 아닙니까?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요. 그렇게 나는 적어도 이 오락실에서 만큼은 최강이 되었다. 그 달콤함 때문에 더욱 자주 들락거리게 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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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리 동네의 오락실이 어느 방송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들뜨기 시작했다. 나의 실력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과연 그날부터 도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다양한 외지인들이 도전해 왔지만, 문제없었다. 다들 흥미 위주로 플레이하는 사람들이고 최신작은 해봤어도 이런 고전을 해보지는 못했을 테니까. 오락실에 가는 기쁨이 점점 더 커져갔다. 역시 오락실은 이래야지. 사람들이 북적이고 서로 도전하며 싸우는 것이 제 맛이다. 어린 시절의 영광이 떠오르는 듯했다. 내가 최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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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도전자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거리 조절이 대단하고 콤보를 맞은 뒤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다음을 준비한다. 왕년에 게임 좀 했던 사람인가? 승리는 당연히 나의 것이었다. 힐끔 맞은 편의 상대를 쳐다봤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인데, 주변에 일행이 여럿 모여서 구경하는 것 같다. 그중 하나가 자리에 앉아 동전을 넣는다. 순간 끔찍했던 과거가 떠 올랐다.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저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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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내가 소속된 버추어 파이터 팀에서 항상 1위를 하던 멤버가 있었다. 리더뿐만 아니라 모두가 신뢰했으며 당연히 인기도 많았다. 내가 좋아하던 누나도 그를 좋아했다. 고작 게임 실력이 좋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빼앗겼다. 내가 최강이 되는 것을 포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증오와 동시에 좌절을 느끼게 한 우리 팀의 최강자. 지금 그가 내 맞은편에서 동전을 넣고 있다. 아마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겠지. 벌써 몇 십 년이 지났으니까. 노인이 돼서도 게임이나 하고 있다니 한심한 녀석! 이번에도 내 앞길을 막는 거냐? 내 등뒤로 동네 노인들이 다가왔다. 서울에서 시니어 팀이 왔다던데, 자네가 이긴 게야? 역시 최고구만! 아니, 최악이다. 내가 지는 꼴을 보여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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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이 시작되었다. 주변이 모두 조용해진다. 심장 소리만이 크게 들린다. 역시 나이가 든 탓인가? 실력은 비슷한 것 같다. 매일 오락실에 오기를 잘했다. 1 라운드를 승리하고 2 라운드 시작. 상대의 헛발질이 눈에 들어온 순간 파고들어 콤보를 날렸다. 승리다. 이렇게 어이없게 이긴다고? 아니, 나의 실력이 그를 압도한 것이겠지. 수십 년이 지나서의 드디어 최강이 된 것이다. 동네 노인들이 뒤에서 환호성을 지른다. 방금 그 사람이 리더래! 자네가 대장을 이긴 거야! 분명 기뻐야 하는데 기분이 묘했다. 과거에 그를 이기지 못해 안달하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땡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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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람이 동전을 넣었다. 맞은편을 보니, 내가 짝사랑하던 누나인 것 같다. 많이 늙었구나. 세월은 누구도 비켜나갈 수 없지. 누나의 실력은 나보다 한참 아래였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예의겠지.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이니 더더욱. 편안하게 대전을 시작했지만, 누나의 공격은 매서웠다. 예상과 다른 엇 박자로 공격이 들어오는가 한번 맞기 시작하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게 누나라고? 이 할머니 대체 뭐야! 1 라운드를 형편없이 지고 2 라운드를 시작했다. 누나가 진짜 보스였구나! 좋아! 나의 진짜 실력을 보여주지!...라고 생각했지만 순식간에 지고 말았다. 동네 노인들도 조용하다. 맞은편 시니어 팀에서는 환호성이 들린다. 도장 깨기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요즘 팀이라면 온라인 대전이나 하겠지. 진짜는 이렇게 얼굴 맞대고 하는 것임을 아는 놈들이면서! 너희는 온라인 세계로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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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다른 게임을 하며 방금 전 대전을 떠올린다. 평생 주눅 들어온 상대를 만나 이겼다. 하지만 과거에 얕보던 사람에게는 졌다. 단순히 세월의 문제인 걸까? 그렇다면 나는 왜 그 긴 시간 동안 과거를 붙잡고 있던 것일까?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오래 전의 서열은 현재의 대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모든 것은 독립적이다. 그리고 한판 졌다고 끝은 아니다. 3판 2승 제도, 5판 3승 제도 있다. 게다가 팀 배틀은 50판 선승제로 진행하기도 하지 않나? 너희가 팀이라면 나는 혼자서 팀이다!


“꼭 이기고 싶으신 거예요?”


소녀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은 처음이다.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 빛이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달성하지 못해야 의미가 생기는 목표도 있는 법이니까. 다시 버추어 파이터에 동전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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