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블 보블
나는 오늘도 동전 교환소 앞에 서 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쪽 끝에 있는 게임기로 시선을 가져간다. 뉴질랜드 스토리. 화면에는 철창에 갇힌 키위새가 보이고 있겠지? 언젠가 그들을 구해줄 사람이 나타나기는 할까? 한때는 내가 직접 해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게임기 앞에 앉아본 적도 있다. 하지만 동전을 넣을 수 없었다. 엄마를 구하지 못했던 기억. 움직이지 않던 다리. 숨 막히던 공기.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귀엽게 보일 게임이지만 나에게는 다르다. 이 오락실에서 가장 두려운 게임이다.
오락실 안을 돌아다니다가 버블보블 화면을 바라본다. 오락실이 유명해진 이후로 가장 많은 사람이 플레이한 게임기기도 하다. 지금 플레이하고 있는 사람은 어린 소년이다. 어느 정도냐면 음... 나보다 더 어려 보인다. 소년이 서툰 손으로 레버를 움직인다. 적이 다가오자 버튼을 누른다. 공룡이 입을 벌려 거품을 쏘고 적은 방울 안에 갇힌다. 그 상태로 공중에 둥둥 떠오른다. 이제 공룡이 방울을 터뜨릴 차례다. 하지만 소년은 움직이지 못한다. 왜 그러는 걸까? 방울에서 적이 다시 튀어나올까 봐? 다른 적들이 공격할까봐? 이렇게 시간을 끌어서는 문제가 생긴다. 아니나 다를까 방울이 흔들거리더니 거품을 터뜨리며 적이 다시 튀어나온다. 소년은 도망친다. 하지만 끝까지 도망치지는 못했다.
가두기만 해서는 끝나지 않는다. 기억도 죄책감도 마찬가지다. 그날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걸까? 가두기만 하고 다시 튀어나올 때까지 방치했던 것은 아닐까? 그날의 문제가 내 마음속에서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금 전 플레이하던 소년과 겹쳐 보인다. 그를 탓할 필요는 없다. 나는 더 겁쟁이이니까. 어쩌면 가두지 조차 못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다시 터져 나올 때까지 방치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 탓이다. 계속 떠올린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오락실 문을 닫는 시간까지 동전 교환소 안에서 머물렀다. 오늘은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소년의 플레이가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계속해서 그의 플레이를 돌이켰다. 시간이 다 되자 사람들이 알아서 빠져나간다. 더 이상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즈음 동전 교환소에서 나왔다. 오락실 문을 잠그고 불을 껐다. 게임기를 돌아보며 하나하나 전원을 내린다. 뉴질랜드 스토리까지 끄고, 버블 보블 앞에 섰다. 결심했다. 오늘은 내가 플레이를 할 것이다. 100번째 하얀 점은 나의 것이다.
땡그랑
게임을 시작하자 방울에 갇힌 공룡이 둥실둥실 떠다닌다. 마치 내 모습 같다. 나는 언제까지 갇혀 있을 것인가? 잠시 후 방울이 터지며 지면에 발을 딛는다. 동시에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적에게 다가가 거품을 쏜다. 적이 방울 속에 갇힌다. 이제 다가가서 터뜨리기만 하면 된다. 소년은 왜 터뜨리지 못했던 걸까? 방울을 터뜨리면 적은 제거되는 것일까? 나는 선택한다. 거품을 터뜨린다. 갇혀 있던 적은 멀리 날아가서 과일로 변한다. 나는 과일을 먹는다. 맛은 느껴지지 않지만 점수가 쌓인다.
몇 개의 스테이지를 지나자 점점 어려워진다. 벽에 갇혀서 조금 시간을 지체했더니 Hurry Up! 이라는 글자가 뜬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엄마. 미안해. 잠시 후 하얀 고래가 나타났다. 뉴질랜드 스토리의 시간의 악마와 같은 존재다. 늦어버린 벌을 주기 위해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정말 나는 너무 늦어버린 걸까? 그렇지 않다. 하얀 고래가 나에게 다가오기 전에 남은 적을 쓰러 뜨리면 된다. 손이 빨라진다. 남은 적은 둘. 시간의 고래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모든 거품을 터뜨린다. 악마 고래는 사라진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되는 걸까? 늦었다는 판단은 포기인 걸까?
수없이 많은 기억을, 고통을, 아픔을 거품에 가둬 터뜨렸다. 그보다 더 많은 마음을 하늘로 띄워 보냈다. 그렇게 게임을 하다 보니 어느새 100 스테이지. 거대한 적이 나타난다. 번개 방울을 쏘며 적을 공격한다.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가진채 공격을 피하기 위해 집중한다. 실패가 두렵지 않냐고? 괜찮다. 이어하면 되니까. 현실에서는 이어하기가 없다고? 아니다. 현실도 이어할 수 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결국 거대한 적이 방울 속에 갇힌다. 거품이 공중에 둥둥 떠있다.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본다. 나는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하지만 터뜨려야 한다. 이대로 둔다면 거품은 약해지고 다시 튀어나올 것이다. 악몽이. 어둠이. 우울감이. 불안이. 두려움이.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 나를 위해서도, 내가 동전을 나누어 준 다른 분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이곳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공룡이 점프한다. 그리고 방울을 터뜨린다. 동시에 눈물이 터진다. 어두운 오락실 한 켠. 울고 있는 내 머리에 누군가의 손이 얹힌다.
땡그랑
100번째 하얀 점은 너의 것이었구나. 하지만 게임은 끝나지 않았단다. 마지막 보스를 쓰러뜨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거든. 이제부터는 함께 해보자. 이 게임이 끝나면 너에게 팩 맨을 줄게.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