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그렇다. 운 좋게 몇 달간 지속한 일이 있었는데, 구두 배달이었다. 구두닦이도 아니고 배달. 역전 지하상가 식당골목의 손님들을 대상으로 구두를 가져오고, 식사를 마치기 전에 다시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손님들은 천 원 지폐를 몇 장 주셨고, 구두 닦는 아저씨는 건당 500원을 떼어 주셨다. 중학생이 손님을 낚으러 다니는 것이 귀여웠는지 식당 아주머니들이 손님에게 먼저 권유해주시기도 했다.
어느 날 구두방에 들어섰는데 아저씨가 특별한 제안을 했다. 종로에 구두를 배달하고 오라는 것. 평소와 다르게 만원이나 준다고 하셨다. 기쁜 마음으로 이를 수락하고 전철을 탔다.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도착한 오피스텔 문 앞. 벨을 누르고 한참이 지나서야 문이 열렸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들이 여럿 모여 있었기에 살짝 움츠러들었다. 납치 같은 건 아니겠지? 서로 경계하다가 구두 봉투를 내밀자 남자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제야 내부가 보였다. 일본 노래가 나오고 있었고, 벽에는 만화 포스터가 잔뜩 붙어 있었다. 벽장에도 일본어로 된 책이 가득이었는데, 대부분 만화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구두를 배달했으니 돈만 받고 나오면 될 텐데,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문 밖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남자들 중 하나는 내가 귀여워 보였는지 과자를 주셨고, 먹고 있자니 만화 볼래? 하면서 비디오를 틀어주었다. 일본어인 데다가 자막조차 없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만화책도 보라고 주셨는데, 크레용 신짱 1권. (나중에 '짱구는 못 말려'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다.) 역시 일본어였다. 잠시 머무르고 있는 동안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더니 제안을 하나 했다.
“뭐 하나 배달 좀 해 줄래? 만원 줄게.”
완전 미쳤다. 한 건당 500원씩 받던 내가 오늘은 2만 원이나 벌게 생겼다. 이게 웬 횡재냐 싶어 당연히 하겠다고 했다. 세운 상가 몇 호에 이걸 주고 오라면서 종이 하나를 돌돌 말아서 주셨다. 절대 구겨지면 큰일 나. 그거 하나에 백만 원이 넘어. 무슨 종이가 그렇게 비싼가 싶어 잔뜩 긴장했다. 구겨지면 내가 물어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오피스텔에서 나서는데 뒤에서 한 남자가 말했다.
“혹시 경찰에게 잡히면 그냥 문방구에서 샀다고 해.”
엄청난 긴장감으로 세운 상가까지 배달을 마쳤다. 종이가 구겨져도, 경찰에게 잡혀도 안된다는 생각에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묘한 쾌감이 있었다. 그 때문일까? 집에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 떠올랐다. 일본 노래가 울려 퍼지는 만화의 세계. 며칠간 끙끙 앓다가 결국 다시 찾아갔다. 두 번째 찾아간 오피스는 훨씬 더 환상적이었다. 남자들도 모두 착하고 선한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아무 용건 없이 찾아온 나를 유독 예뻐하는 남자가 있었고, 자기들을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집에서는 강해야만 하는 나를 아이 취급해 주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자주 오고 싶었지만 생활비를 벌어야 하기에 시간이 부족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형 하나가 제안했다.
“돈을 벌어야 한다고? 그럼, 여기서 알바 할래? 돈을 많이 주지는 못하지만.”
많이 주지 못한다는 금액이 하루에 만 원이었다. 세상에. 전단지를 돌려도 구두를 배달해도 하루에 만 원 벌기는 쉽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 환상적인 공간에서 나를 좋아해 주는 형들이랑 같이 일한다고?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기뻐하며 집에 돌아온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헌 책방에 들러 일본 만화책을 몇 권 샀다. 일본어로 된 책을 내밀었지만 주인 할아버지는 딱히 의문을 갖지는 않으신 것 같았다.
매일 출근하는 형태는 아니었고, 내킬 때 가면 되는 근무 방식이었다. 구두 배달과 비슷했다. 지금 생각하면 고마운 어른들이 어리다고 배려해 준 것이 아닐까 싶다. 이곳은 애니메이션 클럽이었다. 주로 하는 일은 비디오 복사였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공테이프에 복사해서 판매하는 것. 이를 위한 카탈로그가 있었고 형들은 나에게 작품 설명을 해주었다. 고객 응대를 위해서는 감독도 알아야 했고 장르와 주요 연출, 메시지와 제작된 순서 등을 외워야 했다. 입문자 수준의 고객이 오면 내가 설명해 주거나 취향에 맞춰 추천을 해주었고 대부분 귀엽게 봐주셨다. 찐 오타쿠들이 오면 오히려 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주기도 했다. 비디오가 메인이었지만, 일본에서 잡지나 굿즈를 사 와서 되파는 일도 했고, 시중에서 볼 수 있는 500원, 800원짜리 불법 미니 만화책도 만들었다. 지난번에 내가 배달한 애니메이션 '아키라'의 포스터도 그렇게 밀수(?)해온 굿즈였다고 했다.
“형, 그런데 우리는 왜 경찰을 피해서 몰래 해야 해요?”
“일본 애니메이션을 사거나 보는 건 불법이거든.”
“왜요? TV에서도 나오던데…”
“너도 크면 알게 될 거야.”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이 좋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모습에서 어릴 적 선망하던 의적이 되는 기분도 들었다. 연말에는 상영회를 열었다. 당연히 불법이었기에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다. 오피스텔 입구에서 서성이다가 초대장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몇 호실로 가라고 알려주는 식이었다. 첩보 작전을 펼치는 것 같아서 두근거렸다. 상영회에서는 ‘이웃집 토토로’, ‘추억은 방울방울’, ‘아키라’ 등을 상영했다. 일본어로 나와 알아듣지 못하는 영상의 내용보다 이 불법 집회(?)에 관계자라는 두근거림이 더 좋았다.
나중에는 비디오 두 대를 연결해서 복사하는 방법을 배웠고, 연습용으로 작업한 테이프는 내가 가져갔다. 덕분에 온갖 명작과 세일러문 TV판 전편 등 다양한 애니메이션 테이프가 우리 집에 쌓여갔다. 새로운 작품을 알게 되면 귀가 중 헌책방에 들러 원작 만화책이 있는지를 찾아보기도 했다. 형들과도 많은 추억을 쌓아갔다. 뉴타입이라는 애니메이션 잡지가 나올 때마다 일본어를 읽어주며 신작 설명들을 해주곤 했다. 매번 갈 때마다 형들이 만원에서 3만 원을 알바비라는 명목으로 주고는 했는데, 중학생이 벌 수 있는 돈 중에서 이 정도의 일당을 받는 곳은 없었다. 시급이 1000원 근처이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불법으로 오타쿠 교육을 받았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왠지 분위기가 싸했다. 복도 건너편으로 보니 우리 사무실 앞에 경찰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형들 중 하나가 경찰과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순간 얼어붙었다. 감옥에서 고문당하는 상상마저 떠올랐다. 불법인걸 알면서도 한 거지? 어리다고 봐주지 않아! 경찰과 대화 중인 형은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팔을 아래로 내리고는 가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너라도 살아야 해! 이런 느낌일까? 비장한 마음을 가장한 채 집으로 돌아갔지만 사실은 그저 겁먹었을 뿐이었다. 얼마 후 다시 찾아간 오피스텔에는 다른 회사 간판이 붙어있었다. 그동안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 30대가 된 언젠가. 코엑스에서 열린 애니메이션 페어를 관람하러 갔다. 일본 문화 개방이 되며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불법이 아니게 되었고 나는 꾸준히 취미를 이어갔다. 연인에게서 ‘내가 좋아 저 캐릭터가 좋아?’를 듣는 수준이니 훌륭한 오타쿠로 성장한 셈이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중, 어느 부스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와서 나를 붙잡았다.
“혹시… 어릴 때 J 오피스텔에서… 애니 로드라고 알아요?”
남자의 얼굴은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왠지 알 것 같았다. 그 형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반가운 기색을 하며 답변을 하자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몇 사람을 더 데리고 왔다. 클럽의 형들이었다. 모두 애니메이션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역시 한번 오타쿠는 평생 오타쿠구나. 행사장 안에 있는 커피 부스로 이동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견과 싸우며 사람들에게 꾸준히 애니메이션을 전파하던 그들이 이제 진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었다. 분야를 막론하고 하나에 올인하는 사람은 리스펙 하다고 생각한다. 어느덧 40대 50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이들이 애니메이션 업계에 있음에 왠지 모를 작은 감동이 있었다. 형들은 모두 입을 모아 오타쿠를 찬양했다. 명함을 받았지만, 다시 연락은 하지 않았다. 감히 내가 들어갈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 마음에 남은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나도 매우 동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