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과 짬뽕, 가끔 탕수육. 내가 아는 중국집은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헤드헌터를 통해 가게 된 강남의 중국집은 고급 클럽 같았다. 이름을 대니 안쪽에 있는 룸으로 안내해 준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어르신 두 분이 나를 반겼다. 회사를 차리려고 하는데, 애니메이션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듣자 하니 오타쿠라면서요? 게임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봤고. 아, 식사도 주문 안 했네. 뭐 드실래요? 긴장한 채 메뉴판을 훑었다. 이럴 수가! 짜장면도 짬뽕도 보이지 않았다. 중국집 맞아? 몇 시간 후 나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결코 고급 음식점에 압도되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제시한 IP가 내가 좋아하는 개굴소대 애니메이션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소중했던 탄흔의 회사에서 3년간 개굴 빵만 먹었던 것이 왠지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놈의 운명.
Scene 2 # 구름 속으로
첫 출근 일, 서울 한복판에서 5층 건물을 통째로 쓰는 모습에 충격받았다. 지하에는 탁구대와 당구대가 있었고 탄산음료와 라면이 무료로 무제한 제공되었다. 회의실도 10개 이상 있었다. 1층은 판타지 MMORPG를 만드는 팀이, 2층은 무협 MMORPG를 만드는 팀이, 3층은 캐주얼 RPG를 만드는 팀이 있었다. 우리 개발실은 4층이었다. 5층에는 우리와 같은 개굴소대 IP를 사용한 격투 게임을 개발 중이었다. 지금까지 다닌 회사들에 비해 압도적인 시설과 규모에 자만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런 규모의 회사에서 나를 개발 팀장으로 스카우트했다고? 누구나 한 번은 겪는다는 3년 차의 자만심. 그 한가운데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Scene 3 # 구름 4층 사장실
“우리는 개굴 왕국을 만들 겁니다. 개굴 파이터, 개굴 레이싱, 개굴 RPG 등. 개굴 포털을 만들 거예요. 온라인 테마파크인 셈이지요! 우니버스와 일본 만다이와 협력 계약이 맺어졌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개굴소대가 게임계를 정복하는 것인가? 기대감이 부풀었다. 게다가 우니버스와 만다이라니. 홍보도 걱정 없을 테고 이 프로젝트는 전 세계로 뻗어나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리 개발실은 개굴소대로 뭘 만들면 될까요? 제안서를 좀 써볼까요?”
“테니스.”
“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가 테니스입니다. 게임으로 만들기도 쉽지요?”
“아, 네. 뭐… 축구나 농구보다는…”
“개굴 테니스를 만듭시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할 일은…”
“할 일은?”
“사람을 뽑아야죠.”
Scene 4 # 구름 4층 개발실
사장님은 기존에 테니스 게임을 만들던 회사를 인수했다. 팀장으로 계약한 내 입지가 위험할까 살짝 걱정했지만, 다행히 다들 좋은 분이셨기에 문제는 없었다. 그래픽 팀에는 굉장한 미녀 두 분이 있었는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에어컨 걱정은 없겠다’는 점이었다. 아, 이렇게 큰 회사에서 에어컨이 없는 게 더 이상한 건가? 팀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프로그래머가 퇴사하는 일이 생겼고 기존에 나와 친하게 지내던 프로그래머 두 명을 우리 팀으로 데리고 왔다. 그중 하나는 나의 절친이었다. 회사 생활이 점점 즐거워졌다.
Scene 5 # 구름 4층 사장실
기획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사장님이 나를 호출했다.
“우리 게임의 타겟층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연히 개굴소대를 좋아하는 10대가 중심입니다. 우니버스와 함께 간다면 그 방향이 맞을 것 같은데요? 조금 넓게 보면 20대까지도 볼 수 있고요.”
“그건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번에 보니까 휴가 나온 군인들이 하루 종일 PC방에 있더라고요. 그리고 집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독거노인들도 있고.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블루오션 아니겠습니까? 휴가 나온 군인과 독거노인을 타깃으로 잡는 건 어떻습니까?”
“혹시 그 이야기, 우니버스나 만다이와도 공유된 내용인가요?”
“그전에 팀장하고 이야기를 해보는 겁니다. 그나저나 오늘 부른 일은 그게 아니에요. 다른 이슈가 있습니다. 뭐냐면… 음, 4개월 뒤에 클로즈 베타를 해야 해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아직 캐릭터도 없는데 4개월 뒤에 게임을 서비스하라고? 이미 일본 저작권사와 그렇게 이야기가 되어 있다며 막무가내였다. 이상했다. 일본의 만다이라면 게임 쪽으로도 유명한 회사일 텐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4개월 만에 개발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는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4개월은 무리라고 못 박고 나왔지만, 며칠 뒤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퇴근하는 나를 호프집으로 부르셔서는 2주 뒤에 우니버스에게 플레이 버전을 보여줘야 한다는 통보였다. 전 직원이 철야를 하더라도 가능한 기간이 아니었다.
Scene 6 # 구름 4층 개발실
결국 고민 끝에 방향을 잡았다. 우리 회사에서 흡수한 개발팀의 예전 테니스 게임으로 시연을 하고 캐릭터 리소스는 따로 보여주는 것이다. 프로토 타입은 체형 때문에 인간 리소스로 개발했다고 둘러대면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니버스 시연을 위한 버전을 급히 제작했다. 놀랍게도 결과가 좋았다. 문제는 좋아도 너무 좋았던 것이다. 이 시연 내용은 일본의 만다이사에도 전달되었다.
약 1~2주 뒤에 만다이에서 연락이 왔다. 캐릭터 디자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원작 애니메이션에서는 이 캐릭터가 웃을 때 이빨이 5개가 보이는데 게임에서는 6개가 보인다는 것. 어떤 동작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지 않는 동작이라서 캐릭터 성격에 맞지 않는다 했던가. 심지어 그림자의 컬러 값까지… 트집 잡아 괴롭힌다고 생각할 수준의 지적이 잔뜩 있었다. 캐릭터의 외모와 색, 모션, 복장, 표정 등은 모두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것으로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 날부터 나는 퇴근하고 매일 개굴소대 애니메이션을 1기부터 정주행 했다. 장면마다 캡처하고 꼼꼼하게 메모했다. 이렇게까지 하기 시작하니 정말 좋아하던 작품이었음에도 점점 정이 떨어져 갔다. 더 끔찍한 것은 개발팀의 그 누구도 개굴소대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항상 나 혼자서 감상했고, 장면을 캡처해서 그래픽팀에게 전달해야 했다. 게임을 혼자 만들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Scene 7 # 구름 지하 회의실
시연에 대만족 한 우니버스는 만다이와 달리 게임에 대한 제안을 잔뜩 들고 왔다. 문제는 제안을 검토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내가 아닌 사장님이 매번 혼자 다녀왔다는 점이다. 영업을 위해서이긴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요구 사항을 많이 받아오셨다. 그중 하나는 개굴 캐릭터가 맵을 돌아다니다가 아무 데나 테니스 코트를 그려서 지나가는 사람과 시합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10년 이상 지난 지금 만들라고 해도 문제가 산처럼 나올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또 하나는 테니스 시합을 100 vs 100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테니스는 복식이라고 해도 한 시합에 4명밖에 못 들어오니 답답하다는 우니버스의 의견이었다. 말이 팀장이지 나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 말도 안 되는 기획을 어떻게 게임화할 수 있을 것인지가 나의 고민이었다. 당연히 개굴 소대의 세계관 안에서 말이다.
결국 폭발한 것은 나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서버 프로그래머 분이셨다. 사장님이나 투자사에게 화를 낼 수는 없으니 나에게 불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시면서 서버 구조라도 짜오면 고민 정도는 해보겠다고 버티셨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간다고 해도 이 게임은 내가 팀장으로서 개발하는 첫 프로젝트였다. 어떻게든 살려야만 했다. 하지만 나에게 서버 지식은 전무한 상태였다. 그때 한 사람을 떠올렸다.
Scene 8 # 서초의 어느 카페
탄흔의 회사에 함께 다니던 인형 오타쿠. 웹 팀의 서버 프로그래머였던 그는 1인 개발로 웹 게임을 서비스할 정도로 실력이 있었다. 게다가 취미 덕분에 퇴사 이후에도 연락을 주고받던 중이었다. 역시 오타쿠는 세상을 구한다. 이번에는 나를 구해주겠지. 그를 찾아갔다. 그의 집 근처 카페에서 서버 프로그램의 기초와 구조 등을 과외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서버 구조도를 그려냈고 서버 프로그래머 형님과 대화가 통할 정도의 기초 서버 지식은 익힐 수 있었다. 이제 프로젝트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서버 프로그래머 형님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 입장이라도 똑같았을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대고 있었으니까.
Scene 9 # 구름 4층 사장실
사장님이 또다시 나를 불렀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지 불안했다. 우니버스 팀장이랑 술 마시고 왔는데 말이야. 100 명이 테니스를 치는데 공이 하나면 나머지가 심심하잖아? 그렇다고 공이 많으면 엉망진창이 될 테고. 내 말이 맞지? 의외로 정상적인 이야기를 하셔서 놀랐다. 다시 일반적인 테니스로 돌아가는 걸까 싶었던 나의 기대는 다음 순간 와장창 깨졌다.
“총을 쏘자. 지난번에 총 쏘는 게임 만들었다며? 공을 안 치는 사람은 심심하니까 총을 쏘는 거야. 상대가 공을 못 받게끔. 원래 개굴소대도 총 쏘는 장면이 많이 나오던데? 맞지? 자네가 애니메이션 안 본다고 하도 화를 내서 내가 몇 편 봤거든. 하하하하.”
상상해 보라. 테니스 코트에 양쪽으로 100명씩이 서있다. 한 손에는 테니스 라켓,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서브를 시작하는 순간 서로 쏘아 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나? 게다가 테니스 코트는 오픈 월드로 아무 데나 그릴 수 있다고 한다. 이 게임을 과연 살릴 수는 있는 걸까? 이전에도 엄두가 나지 않던 이야기였지만, 서버를 배운 시점에서 더욱 암담해지고 있었다. 나에게도 찾아왔던 3년 차의 자만 모드는 순식간에 짓밟히고 억눌리며 무너졌다. 어찌 보면 감사한 일이다. 누구나 겪는 잘난 척 시기를 짧게 마감 지었으니까. 그리고 이야기는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