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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즈 Dec 05. 2024

[5] 구름 밖으로 개굴

3년 차에 겪은 개발 책임자의 한계

('구름 속에서 개굴'에서 이어집니다.)


Scene 10 # 회사 근처 홍어집


“마 팀장! 오늘 소주 한잔 하지.”


사장님이 근처 가게로 부르셨다. 홍어 먹을 수 있냐고 묻길래 괜찮다고 했다. 사람이 못 먹을 음식을 팔지는 않겠지. 음식보다 먼저 나온 소주를 가득 따라주며 사장님이 말했다. 요즘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더라고. 서버가 사사건건 방해한다는데, 잘라버릴까? 한참 위로하던 사장님은 결국 마지막에 본론을 꺼냈다. 누구든 귀찮게 하면 이름 적어와. 정리 좀 하자. 이번주까지 고민해 봐.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 태어나서 처음 먹은 홍어는 도저히 사람이 먹을 음식이 아니었다.

Scene 11 # 구름 4층 사장실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 누구의 이름도 적어 내지 않았다. 무슨 초등학교님도 아니고, ‘떠든 사람 : 마이즈’ 이런 건가? 유치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장님이 찾는다는 말에 들이받을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용건은 그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더욱 엄청난 이야기를 꺼내셨다.


“개굴 왕국을 만들기 위해서 중요한 제안이 있다. 우니버스에서 제안한 거야.”


만다이가 아닌 우니버스의 제안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개발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건 리소스 제작 기한. 맞지?”


그랬다. 우리가 개굴소대 리소스를 만들면 우니버스에게 검수를 요청하고, 우니버스는 만다이에게 검수를 요청하며, 만다이는 원작 잡지사에 검수를 요청하고, 원작 잡지사는 원작자에게 검수를 요청한다. 되돌아오는 것도 그 순서대로다. 검수면 그나마 다행인데, 새로운 것을 추가라도 하려면 같은 프로세스로 의견이 전달되고 돌아온다. 한마디를 전하는데 최소 2주가 필요했고, 답변이 돌아오면 한 달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제안이라고 하니 왠지 솔깃해졌다.


“줄일 방법이 있습니까?”

“줄일 방법은 없지만, 이미 개굴 파이터는 서비스를 하고 있잖아. 이건 검수가 통과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테지. 그래서 말인데, 개굴 파이터의 리소스를 우리 테니스에도 쓰고 개굴 RPG에도 쓰고 레이싱에도 쓰는 거야. 공유하자는 것이지.”

“안됩니다.”


곧바로 즉답하자 사장님은 화냈다. 왜 해보지도 않고 그러냐며.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비효율적임을 알면서도 일단 시도는 했다. 예상대로 시간만 날렸다. 그래도 희망이 생겼다. 적어도 사장님이 이 프로젝트를 진지하게는 생각한다는 확신이었다. 이후 사장님은 그 당시로는 거의 도입되지 않은 모션 캡처를 제안하셨고 우리 프로젝트에 이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굴 소대와 인간은 체형이 달라도 너무 달라 하나하나 손으로 수정해야만 했다. 담당 애니메이터는 이럴 거면 그냥 직접 작업하는 게 더 빠르겠다며 투덜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효율적이라는 증거가 필요했기에 그냥 해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적어도 노력하는 사장님에게 무조건 반대하지는 말자. 나는 그렇게 조금씩 사회와 조직 생활에 타협해가고 있었다.

Scene 12 # 구름 근처 치킨집


퇴근하던 중 그래픽팀 미녀 둘을 마주쳤다. 가볍게 목례하고 지나가려는데, 치맥 한잔하자고 한다. 잠시 고민하다가 OK 했다. 여성 분들에게는 조심스러운 탓에 거리감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치맥을 하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초기에 인수한 테니스 개발팀은 나를 매우 싫어한다고 했다. 사장님과 한통속으로 생각한다며. 그래픽 팀은 리소스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한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심지어 최근에 불필요한 작업을 강요당한 애니메이터는 퇴사 고민까지 하고 있다고. 반면, 프로그램팀은 서버 형님을 중심으로 나를 변호한다고 했다. 중간 관리자란 이런 걸까.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모두 치이는 존재. 참담한 기분. 그래도 이렇게 직접 시간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했다.

Scene 13 # 구름 4층 사장실


당시 게임 업계에서는 MMORPG 개발자가 아니면 다소 무시받았다. 전에는 피쳐폰을 무시하더니 이제는 장르라는 잣대로 사람을 평가한다. 테니스를 만든다고 하면 내려다보는 시선을 갖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사장님의 제안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무협 MMORPG를 만들 겁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시지요.”

“우리 테니스는요?”

“그건 그것대로, 이건 이것대로.”

“안됩니다. 지금 개발팀 숫자로 둘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기간도 부족해요.”

“기간은 제가 영업해서 늘릴게요. 사람은 더 뽑으면 되잖아요?”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것도 하필이면 무협을?”

“아래층 무협 MMORPG 개발팀 있지요? 그 회사가 곧 빠질 겁니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안다. 사장님은 영업에 있어서 엄청난 능력자였다. 아래층 스튜디오가 빠지는 것은 우리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장님은 기회로 생각한 것이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MMORPG. 게다가 팀장으로 담당하게 되다니. 심지어 개굴 테니스의 기간도 연장해 준다고 하지 않는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조금 더 야근하고 조금 더 철야하면 되겠지. 사람은 더 뽑아 준다잖아?


“마팀장이 허락할 줄 알고 유명한 무협 작가를 이미 섭외해 두었어요. 시나리오 걱정은 안 해도 될 겁니다.”


역시 사장님은 계획이 다 있으셨구나. 빠른 추진력에 감탄했다. 며칠 뒤 시나리오가 도착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게임에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한 부분이 많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초기 설정이었다. 마교의 무공에 의해 기가 약한 사람들은 말을 할 수 없다는 부분이었다. 작가의 시나리오에서는 40 레벨이 될 때까지 채팅을 할 수 없게 한다고 쓰여 있었다. 청각도 마비되어 있는 설정이라서 채팅창 자체가 보여서도 안된다고. 이게 대체 뭐지?


“안됩니다. 이 시나리오는 수정이 필요합니다.”

“아니, 정말 유명한 작가라니까요. 여기 있는 대로만 하면 대박 날 겁니다.”

Scene 14 # 구름 4층 개발실


사장님이 한 남자를 데리고 개발팀에 들어오셨다.


“인사하세요. 우리 개발 실장입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할 거예요.”


그랬다. 시나리오에 반대하던 나를 누르기 위해 팀장 위에 실장을 배치한 것이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고통을 대신 감내해 줄 상급자가 온다면 나도 좀 살만하겠지. 많이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전에 어떤 프로젝트를 하셨냐고 물었다.


“아, 양말 공장에 다니면서 무협지 쓰고 있습니다.”

“양말 공장? 왜 하필이면…”


개발 실장은 얼마 전 받은 시나리오의 작가였다. 유명세라도 있으면 다행이려니 싶었으나 그의 소설은 온라인 사이트에 무료 연재 중인 한 편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마지막 업로드로부터 수개월이 지나 있었다. 사장님에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적어도 개발 경험이 있는 사람을 불러달라고 했다. 며칠 뒤 이번에는 개발 이사가 새로 왔다. 학습용 플래시 게임을 만들었던 분이라고 하셨다. 개발 팀장 위에 실장, 그 위에 이사. 가장 쇼킹한 사실은 내 밑에 기획자가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나는 순식간에 개발 팀장에서 말단 기획자가 된 셈이다.

Scene 15 # 구름 근처 호프집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친해진 분이 알고 보니 바로 옆 건물에 근무하고 계셨다. 회사는 나 역시 어릴 적에 다니고 싶었던 오래된 회사였다. 몇 번 같이 점심을 먹으며 친해졌고, 서로의 프로젝트를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사실, 이 회사에서의 첫 프로젝트는 드랍 되었어.”

“저런, 무슨 프로젝트였는데?”

“개굴소대 좋아하지? 그걸로 테니스를 만들고 있었거든.”


충격이었다. 우리가 그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고 하자, 표정이 변했다. 듣자 하니 해당 프로젝트는 우니버스와 만다이에게 투자를 받아 진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끼어들어 프로젝트를 빼앗아 갔다고. 당시의 나는 사업적인 지식이 전무한 상황이었기에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우리 사장님의 뛰어난 언변과 영업력이 발동된 것이다. 아래층 무협 MMORPG를 가져온 것처럼.


“친구니까 충고해 주는 거야. 그 프로젝트를 계속한다면, 노력해도 결국 넌 도둑놈이 되는 거야. 적어도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그렇게 느껴져.”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친구의 게임을 플레이해보았다. 총을 쏘는 괴상한 테니스와 달리 명확하고 깔끔했다. UI와 콘셉트도 놀라웠고 개굴 소대의 특징도 잘 살렸다. 여기에서 노력한다고 내가 이것보다 잘 만들 수 있을까? 4개월 만에? 도둑질한 프로젝트라는 것은 괜찮았다. 내가 훔친 것도 아니고. 나는 전설의 도둑 마이즈니까. 하지만 적어도 원 프로젝트보다는 좋은 작품이 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나의 자존심이었다. 그날은 사무실에서 밤 새 개굴 소대 애니메이션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Scene 15 # 구름 옥상


옥상에서 혼자 화를 삭히고 있는데, 사장님이 올라오셨다. 마침 잘됐다 싶어서 물었다.


“단도직입 적으로 묻겠습니다. 개굴 테니스. 빼앗아 오신 겁니까?”

“누가 그러던가요?”

“아래층 무협 스튜디오가 나간 것도 사장님이 한 일인가요?”


사장님은 바로 답하지 않고 난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밖을 내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마 팀장을 내보내지 않는 줄 알아요? 사사건건 안된다고만 하고 말도 듣지 않는데?”

“저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제 팀장이 아닌 말단 기획자 아닌가요?”

“그럴 리가요. 애니 전문가인 마 팀장에게는 더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거든요.”

“네?”

“다음은 베르베르크입니다. 그리고 슬로 덩크도 있어요.”


베르베르크라니… 개굴 소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파괴력이 있는 한 단어였다. 심지어 슬로 덩크라고? 사장님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것이지?


“우니버스와 반다이를 만나면서 제가 무얼 했을 까요. 개굴 소대는 잘 만들어도 투자사 좋은 일만 하는 거예요. 개굴 왕국 기억하죠? 그건 온전한 우리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프로젝트를 해야지요.”


그리고 사장님의 이야기를 한참 들었다.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기대해도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개굴 테니스는 본래 테니스 게임 개발팀의 기획자에게, 무협은 양말 공장 출신의 무협 작가에게 맡기는 것이 목적이라고. 나에게는 더 중요한 프로젝트를 줄 거라고. 또다시 감언이설에 넘어가 자리로 돌아왔다.

Scene 16 # 구름 밖으로


자리에 돌아오니 개굴 소대 피규어가 죽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들을 버릴 거냐며 탓하는 듯했다. 개구리들이 총을 쏘는 테니스, 그리고 40 레벨까지 채팅을 할 수 없는 MMORPG를 버리고 꿈의 프로젝트를 담당한다? 그럴 수는 없었다. 시작이 어찌 되었든 이 두 게임도 나의 아이들이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베르베르크도, 슬로 덩크도 정상적으로 개발할 수 없을 거라는 판단이 되었다. 사장님을 불렀다.


“그만두겠습니다. 다만 개굴 테니스의 원형은 만들어두고 나가겠습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총을 쏘는 순간 테니스는 의미 없어집니다. 공도 라켓도 경기장도 빼고 총만 쏘는 걸로 만듭시다. 그건 제 전문분야입니다. 그리고 테니스는 원래 만들던 회사로 넘기시지요. 제가 해봤는데, 정말 잘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개굴 테니스는 개굴 슈팅이 되었다. 개굴 왕국 프로젝트는 무산되었고, 베르베르크와 슬로 덩크, 무협 MMORPG는 결국 출시되지 못했다. 개굴 테니스 역시 본래의 주인을 찾아가지 못했다. 누구나 찾아오는 3년 차의 시기. 조직에 대해, 비즈니스에 대해 여러 모로 크게 데이며 배우게 된 시기가 이때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만심 대신 무능 병이 도지긴 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빌런으로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사장님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자가 아니었을까? 내가 처한 상황 탓에 색안경을 낀 부분도 있을 것 같고, 프로젝트를 빼앗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

P.S.

개굴 테니스는 공이 빠지고 슈팅이 되면서

완전히 다른 게임이 되었다.

코트와 공의 제약이 사라지니 자유로워졌고,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상용화 시점은 내가 떠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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