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쫓겨났다. 그래도 낳은 ‘죄’가 있으니 속옷은 남겨준다고 했다. 팬티 한 장만 달랑 걸친 상태로 집 앞 약수터로 올라갔다. 옷 한 벌 없이 시내로 나갈 만큼 철판은 아니었다. 계획은 이랬다. 약수터를 올라가다 보면 쉼터가 있다. 거기에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걸어서 일하는 매장으로 가자. 아침까지 버티면 사장님 옷 한 벌은 빌려주시겠지. 한참을 기다리다가 슬슬 날이 어두워졌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산을 내려왔다. 약수터 입구에 다 달았을 때, 정자에 앉아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이야기 좀 하자.”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우리 집안 형편에 대학 진학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나는 하루라도 빨리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대학을 가지 않고 게임 회사에 취업하겠다는 말에 어머니가 난리가 난 것이다. 당시 인식상 게임은 지금보다 더욱 사회 악이었고 오락실은 불량배들의 소굴이었다. 아직 한국에 PC방이 생기기 이전이었다. 어머니와 오랜 시간을 이야기하다가 극적으로 타협했다. 한 학기만 다녀보기로. 그래도 별로라고 생각되면 그만두기로.
기왕이면 게임 학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당시 게임 학과는 전국에 두 개뿐이었고, 그중 하나는 여자 대학교였다. 숭의여대 게임학과에 쳐들어가서 교수님 방문을 무턱대고 노크했다. 여장하고 다닐 테니 받아달라고. 교수님들도 어이가 없으셨겠지. 당연히 제안이 통과될 수는 없었고, 고심 끝에 산업공학과를 선택했다. 게임 학과가 없다면 산업에 있어 가급적 다양한 시야를 갖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성적이 좋지 않았기에 대학은 충북 영동에 있는 지방대였다. 심지어 추가 합격이었으니 거의 꼴찌로 합격한 셈이다.
첫 등록금은 아버지가 내주신다고 했다. 나와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어떻게든 받아낸 모양이었다. 신세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지만 수백만 원이나 되는 대학 등록금은 스스로 감당하기엔 너무 컸다. 학자금 대출도 없는 시대였으니까. 지방대라서 머물 곳이 걱정이었지만, 신입생의 특권으로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미친 듯이 공부했다. 다음 학기에 그만둘 생각도 있었지만, 만에 하나 그렇지 못할 경우 어머니가 또 아버지에게 손을 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떠넘기고 싶지는 않았고, 상대가 아버지라면 더욱 그랬다. 단 한 번이라도 장학금을 놓치면 대학은 그만둘 생각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전액 장학금은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받았고, 대학은 무사히 졸업했다. 졸업할 때 우수 학생 4명을 뽑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심지어 여기에 선정되면서 500만 원의 장학금까지 받으며 졸업할 수 있었다.
주말에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으므로 공부할 시간은 평일 뿐이었다. 매일 새벽 4-5시까지 공부를 하다가 잠들었다. 밤에는 쌀쌀했기에 아무 때나 걸치기 좋은 실험 가운을 자주 입었다. 언젠가부터 기숙사에 매일 밤 복도를 헤매는 귀신 이야기가 떠돌았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새벽에 실험 가운을 걸치고 다니는 내가 귀신의 정체였다.
2학년이 되면서 기숙사를 나와야 했다. 자취방을 구할 돈도, 하숙집을 구할 돈도 없었다. 일주일 내내 일해도 모자랄 판에 주말만 일해서 가족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기 때문. 식비는 하루에 평균 천 원이었다. 굶는 날이 더 많은 상황에서 월세는 낭비였다. 고민 끝에 학교에 숨어 지내기로 했다. 도서관 열람실에 엎드려 자는 날도 있었고, 사람이 없으면 의자 여러 개를 붙여놓고 그 위에 누웠다. 그러다가 꾀를 내었다. LAB실 관리자를 자원하고 책상 밑에 숨어서 잔 것이다. 불법 점거자를 쫓아내려는 야간 경비 아저씨와 치밀한 숨바꼭질을 해야 했는데, 이 또한 즐거운 추억이다.
내가 만든 게임동아리가 동아리실을 배정받은 이후에는 동아리방에 신문지를 깔고 몸을 뉘었다. 양말을 팔던 모 기획 회사에서 일해본 가닥이 있어서 콘크리트 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은 익숙했다. 나중에 학교에 급습(?)하신 어머니는 자랑스럽게 선보인 동아리 방의 잠자리를 보고 크게 소리 내어 우셨다. 그 길로 나를 끌고 자취방을 계약했다. 어차피 내가 벌어서 내야 하는 돈인데… 불만이 가득했지만 서럽게 우는 어머니 앞에서 말할 수는 없었다.
자취방이 생기자 좋은 일도 생겼다. 일단 밥을 굶는 날이 줄었다. 밤만 되면 친구들이 술과 라면을 들고 찾아왔다. 한바탕 안주 빨로 배를 채우고, 그들이 남긴 음식으로 몇 끼를 더 먹을 수 있었다. 자취하는 여학생들도 내 방을 자주 찾았는데, 이상한 이유가 아니라 숨기 위해서였다. 남자들이 술을 들고 자꾸 찾아온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끔찍하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숨겨주다 보니 남사친 보다 여사친이 더 많아졌다.
공부만 하는 고학생으로 오해할까 봐 말하자면, 노는 것도 열심히 했다. 대학 4년에 휴학 2년을 합쳐서 6년 내내 연애를 쉬지 않았다. 게임 동아리를 만들어서 활동했고, 대학 기간 중 중소기업청에 창업 연수를 받고 작은 사업도 했다. 학교 축제에서는 무대에 올라 ‘시대 유감’을 불러 인기상을 받았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노래를 잘 불러서 받은 상이 아니라 인기상이라는 점이다. 어디 CF에 나오는 것처럼 공부도 열심히, 일도 열심히, 노는 것도 열심히.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시기일지도 모른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교를 그만둬야 한다는 압박은 항상 있었다. 그래서 성적에 예민했는데, 동기들과 자주 싸우게 되는 부분이 컨닝이었다. 정당한 승부에서 패배한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였겠지만 다수의 학생이 컨닝을 했다. 매번 참고 넘기다가 결국 못 참고 폭발했다. 올 A+을 받던 나는 이 사건으로 학교 설립 이래 첫 올 F를 받게 된다.
“컨닝 경연 대회에 참가할 마음은 없습니다!”
교수님 방에 쳐들어가서 한 말이다. 당시 학교에는 신기한 소문이 있었는데, 올 F를 받으면 등록금을 돌려준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당시에는 이를 믿었다. 어차피 수석 장학금을 못 받는다면 돌려받기라도 하자는 생각에 그 학기 모든 시험에 백지를 제출했다. 하지만 성적 우수 학생이었기 때문일까? 몇몇 교수님들은 그럼에도 점수를 주셨고 한 분 한 분 찾아가서 F로 바꿔달라며 난리를 피웠다. 그렇게 치열한 노력(?) 끝에 드디어 올 F를 받는 데 성공했다. 학교 설립 이래 첫 올 F였다. 더 이슈가 된 사실은 지난 몇 학기 간 수석 장학금을 받던 학생이라는 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등록금은 돌려받지 못했고, 나는 휴학을 하고 군 입대를 준비했다.
동생의 고등학교 성적은 꽤 준수했다. 서울에 있는 좋은 학교를 가기로 함께 정했지만, 등록금 마련 때문에 고민이 생겼다. 이 시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만나던 연인의 죽음을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주도까지의 도보 여행으로 짧은 방황을 했다. 이 부분은 600km라는 나의 다른 자전적 소설에 담겨 있다. (홍보 아님). 하지만 동생은 나와의 약속을 깨고 몰래 같은 학교에 지원했다. 알고 보니 형제가 같이 다니면 등록금의 일정 비율을 감면해 주는 장학금이 있었다. 내 걱정을 한 것일까? 동생도 다음 학기에는 장학금을 받았다. 미안하면서도 감사했다. 내가 조금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 좋은 학교에 보내줄 수 있었을 텐데.
학교에서 큰 행사가 있었다. 삼성, LG, SK등 주요 대기업 다섯 군데에서 인사 담당자가 방문했고 학교 강당에서 공개 면접을 진행하는 행사였다. 학교에서 선정한 다섯 명의 우수 학생에게는 대기업에 입사할 기회였고, 다른 학생들에게는 대기업 면접을 참관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중 하나가 나였다. 대부분의 학기에 수석을 했고 이미 보유한 자격증 수가 10개가 넘기에 뽑힌 것 같았다. 같이 면접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들떠 있었지만, 나는 내내 시큰둥했다. 기묘한 면접이 끝난 뒤, 다섯 개 기업 중 하나인 삼성 담당자가 물었다.
“인턴으로 입사 기회를 제안하고 싶은데, 우리 회사에 올 의향이 있습니까?”
관객석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국내 최고의 대기업에 입사할 기회라니. 그것도 이런 지방대에서? 다들 부러워하는 기회였던 것 같다. 이후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면 한 번씩 안주거리가 되는 장면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대답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제가 알기로 과거에는 몰라도 현재의 삼성에서는 게임을 만들지 않지 않습니까? 게임 사업부를 만드시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게임 동아리 회장 다운 답변이었을까? 이후 학교에서 나를 보며 게임에 미친놈이라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동생이 이야기했다. 자기 학과 선배들도 형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 뿌듯하고 자랑스럽다고. 동생은 어머니와 외조부모님에게도 형이 학교에서 유명하다고 이야기했다. 유명한 이유를 다들 오해하신 것 같지만, 뭐 상관없지.
이쯤에서 궁금하겠지? 첫 학기를 보내고, 왜 계속 다닐 생각을 했는지. 어쩌다가 한 학기만 다니려던 대학을 졸업까지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장학금이었다. 아버지에게 신세 진 돈을 돌려주려고 공부했는데, 현금으로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학기의 등록금 면제 형태로 반영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 여기에서 그만 두면 내가 받은 등록금 액수의 장학금을 손해 보는 셈이니까. 어쩌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은 내가 반발심에 공부를 하고 장학금을 받을 것까지 계산하셨던 것은 아닐까? 설마 아니겠지? 그렇게 까지 치밀한 분은 아니시니까.
교수가 되고 나서부터 학생들을 보면 그 시절의 일들이 종종 떠오른다. 내 삶에서 가장 즐겁고 열정적이었던, 현실을 모르기에 더욱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 시기. 공부도, 노는 것도, 연애도, 게임도, 진로도, 일도 모두 잡아낼 수 있었던 유일한 그 시기. 내 삶에서 가장 반짝였다고 기억되는 시기. 자신의 현재가 얼마나 특별한 시기인지 모든 대학생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가끔 게을러지거나 마음이 무너질 때면 돌이켜 본다. 자랑스러운 과거의 나. 그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는지. 그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지.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그렇게 멋진 대학 생활을 할 자신은 없다. 나 스스로도 압도되는 시절이다. 하지만 인간은 마치 드릴처럼 한 바퀴 돌릴 때마다 앞으로 전진하는 존재라고 한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좋지만 그 자리에 머물지는 말아야겠다.